[메아리]

위 사진은 기사내용과는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청주시 북일면 출신인 민기식 장군(1921~1998·육군대장 예편·3선 의원 역임)은 5·16 군사정변 당시 전방 2군단장 이었다. 그는 1961년 5월 15일 강원도 원주시 1군 사령부에서 열린 1군 창설 기념 체육대회에 2군단 축구 선수들을 거느리고 참석했다. 혁명 하루 전날 전방 육군의 한가로운 모습 이었던 셈이다.

축구 경기를 막 시작할 무렵 문제가 생겼다. 민 장군은 경쟁부대인 군사령부(본부)가 서울에서 민간인 축구선수들을 대거 투입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군사령관은 이한림 장군 이었다. 그는 "부정선수를 즉시 빼라"는 민 장군의 항의를 묵살했다. 두 장군의 자존심 대결과 실랑이는 양보가 없었다. 물러설 수 없었던 민 장군은 병력과 축수선수를 춘천 2군단 사령부로 철수시켰다. 울화가 치민 민 장군은 참모들을 원주 시내 중국집으로 데려가 '배갈'로 대취한 채 여관에서 잠이 들었다.

5월 16일 아침 7시께 잠을 깨운 참모로부터 박정희의 쿠데타 보고를 받은 민 장군은 전날 화를 돋운 이한림 사령관이 어느 쪽에 섰냐는 것부터 파악했다. 이한림은 쿠데타군을 분쇄하자는 입장이었다.

민 장군 휘하 2군단은 비상사태가 서울에서 발생하면 예하 12사단 1만2천명을 완전무장시켜 트럭 500대와 전차 1개 대대를 이끌고 2시간 30분안에 서울에 도착해 상황을 진압하는 게 작전계획상 임무였다. 윤보선 대통령은 군용기로 친서를 지닌 비서관을 보내 '쿠데타군을 진압하라' 명령했다. 2군단이 서울에 진격하면 박정희의 쿠데타군과 격전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시가전도 마찬가지 였다. 민 장군은 5·16 주도 세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민 장군은 대통령 친서조차 무시했다. 결국은 5·16이 성공한 절대적 배경이 됐다. 민 장군이 훗날 고향(문의면) 후배이자 당시 대한일보 정치부 기자였던 신경식 대한민국 헌정회 회장(4선 의원 역임)과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빼놓지 않았던 일화이다. 신 회장이 자서전이자 정치비화를 기록한 '7부 능선엔 적이 없다'를 통해 소개한 내용이기도 하다. 신 회장은 "부정선수가 낀 축구 대항전이 역사를 바꾸어 버린 셈"이라고 촌평했다.

민 장군은 이 일이 영향을 미쳤는 지, 성공한 쿠데타 이후 승승장구 했다. 민장군은 1964년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후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다. 충주비료공장 사장을 역임한 후 고향 청원 선거구에서 7, 8, 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며칠 후면 '5·16 군사정변' 55주년을 맞는다. 군사쿠데타에서 군사혁명, 군사정변까지 명칭도 시각에 따라 다르다. 올해도 또 한차례 공과가 거론될 것이다. 주역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맏딸이 현직 대통령이라 엇갈린 시각은 더욱 양극화 될 듯 싶다. 논란과 별개로 근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 배경 중 하나가 '군대 축구'라는 점이 흥미롭다. / 한인섭 부국장 겸 정치행정부장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