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민정 수필가

곡우(穀雨)의 단비가 대지를 촉촉하게 적신다. 직원들과 함께한 여행길, 상해에서 항주로 이동하는 차창 밖으로 비치는 녹차 밭은 푸른 초원이 끝없이 이어졌다. 삼지창으로 혀를 내민 찻잎들은 가볍게 불어오는 바람에 샤워를 한다. 굽이굽이 구릉을 따라 물결치는 고랑마다 차 잎을 따는 아낙들이 흰 물떼새처럼 내리 앉아 있었다.

 녹차를 보면 그때가 생각나 슬그머니 미소가 피어오르곤 한다. 이십대 중반이었다. 친구의 권유로 신부수업을 받기위해 '규수원'에 입소하였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조심스럽게 무릎 꿇고 앉아 두 손으로 찻잔 받쳐 들고 마시는 '다도(茶道)'를 배우며 언젠가는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 청혼해 올 것을 꿈꾸었다. 신랑감도 없이 그저 미래에 있을 막연함을 믿고 '규수원'에서 신부수업을 받았다는 것이 귀여운 도전이었지 싶다. 그 시절, 여자는 오로지 현모양처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믿었었다.

다행히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인연을 만났지만, 친구는 아직도 인연을 만나지 못하고 녹차 밭이 가까운 청도에서 도자기와 다기와 인연을 맺고 살아간다. 친구는 몇 년에 한 두 번씩 인사동과 문화센터를 통해 다기와 도자기 전시회를 열며 나름대로 자신의 세계에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살아가고 있다. 찻잔하나에 혼을 불어넣고 차의 마음을 잔에 담는 모습은 천상여자였다. 심지어 그녀는 상대가 어떤 향이 나는 차를 마시고 싶어 하는지, 어떤 찻잔을 좋아하는지 감각적인 면에서도 정성을 다한다. 남을 섬기는 그녀를 볼 적마다 그녀의 행동은 닮을 수 있었지만 분위기만큼은 닮지 못했다.

이맘때 녹차 밭에는 나의 이십대의 청춘이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언제나 시원하고 늘 푸른 초원이었다. 나는 에버그린을 달리는 조랑말이었다. 거침없이 달리고 두려움 없이 스스로를 대견해 했었다. 그러나 이후 나는 거친 광야로 내 몰리게 되었다. 준비 없이 달려간 광야에는 이별, 질병, 위기, 등 수많은 변화로 나의 에버그린을 네버그린으로 바꿔놓았다.

끝도 없는 산등성을 지나고 메마르고 뜨거운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을 지나야만 했다. 시간이 지나 지금에서 돌이켜 보면 내가 지나온 거친 광야에서의 삶은 철저한 훈련이고 사랑의 채찍질이었다. 광야의 삶을 통해 나를 낮추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따뜻한 인성을 배우게 했고 어리석은 눈을 가리어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듣는 지혜가 생겼다.

가끔씩 삶이 내몰릴 때 마다 다관에 물을 붓고 찻잎을 넣는다. 다관 안에서 지친 삶들이 후드득 떨어진다. 그것들을 말없이 받아 마신다. 목안이 열리는 순간 답답하던 마음도 열린다. 입안에 남아도는 담담한 향기가 기분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부드럽게 승화시킨다. 마음이 즐거울 때는 차 맛도 달다. 그러나 마음이 울적하거나 울분에 차있으면 이상하리만큼 쓴맛이 난다.

사람의 마음을 먼저 읽는 차는 정성과 사랑을 담아야 제 맛을 내어주기 때문이다. 차는 혼자 마시면 탈속하고,(一人神) 두 사람이면 한적하여 좋고(二人勝), 서너 명이면 즐기고 대여섯 명이면 들뜨고, 일고 여덟 명이면 베풀며 남을 배려하는 여유가 있다고 다경 에서는 말한다. 지금은 비록 푸른 초원은 아니지만 세월의 더께를 더한 '보이차'처럼 발효되고 성숙되어 더욱 가치 있는 삶이 되도록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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