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창조경제팀장

한여름 밤의 마당은 삶이라는 풍경이 깃든 곳이었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가라앉고, 뒷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솔잎 향을 뿌리면 하늘에서는 별이 총총하게 쏟아졌고 보름달도 무진장 밝게 빛났다.

우리 가족은 마당 한 가운데에 멍석을 깔아놓고 앉아 수박과 옥수수를 먹으며 한여름 밤을 노래했다. 막걸리 한 잔 걸친 아버지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가마솥에서 저녁나절 구운 토종닭 한 마리를 건져 왔다. 우리 형제들은 마당 한 구석에 있는 우물가에서 서로의 등짝을 밀어주며 등목을 하곤 했다.

도시에 살면서 마당을 구경하는 일은 보물찾기보다 더 어려워졌다. 아파트와 빌딩과 연립주택이 도시를 점령했으니 마당 깊은 집을 구경하는 것은 기대할 수도 없지만 설령 있다손 치더라도 남의 집 대문을 넘어갈 수 없는 노릇이다. 솔잎 향 소리, 등목 하는 소리, 별 헤는 소리, 부지깽이 불쏘시개 닦달하는 소리는 아련한 추억이 되었고, 밤 바람에 살짝 풀어져도 맘 편한 마당은 전설 속으로 사라졌다.

그날 저녁, 산성고개 너머 산들바람이라는 식당에서 펼쳐진 파티는 마당이 있는 풍경까지는 아니었지만 숲속의 정원을 품으며 즐겼던 달달한 하룻밤이었다.

젓가락문화포럼을 위해 중국과 일본에서 건너온 손님 20여 명과 함께 삼겹살에 소주 한 잔씩 기울이며 머리카락 날리는 밤바람에 서로의 마음을 부려놓았다. 그들도 일상화된 식당 풍경보다는 자연 속에서 끼쳐오는 자유와 정감이 오달지고 마뜩했던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문화가 다르고 언어도 다른 사람들이 어깨동무하며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었을까. 한중일 3국의 젓가락문화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포럼과 협의회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고 젓가락문화의 가치를 더욱 발전시키자는데 의견을 모았기 때문이며, 생명문화라는 동아시아의 공통된 숙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함께 손잡고 풀어가자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파티가 있기 전에 한중일 3국은 젓가락문화 공동선언문을 채택하고 3국 대표가 모여 서명을 했다. 선언문을 채택하기까지는 진통이 적지 않았다. 글자 하나 하나가 주는 의미부터 자국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입장에 이르기까지 미묘한 차이를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통역과 번역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면서 자칫 감정과 갈등이 폭발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합의된 선언문은 한중일 3국의 공통된 문화원형이자 생명문화의 상징인 젓가락문화를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데 함께 힘을 모으자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각국의 전통문화를 조사연구하고 아카이브로 구축하며 젓가락교육, 젓가락 문화상품 개발, 젓가락 장단 등을 위해 힘쓰자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한중일 3국이 손을 잡고 젓가락문화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자는 내용까지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젓가락문화 단행본을 출간하자는데 뜻을 모았다. 각 국의 문화적 가치를 책으로 엮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 3국이 하나의 주제로 서로의 문화적 특징을 한 권의 책 속에 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게다가 우리는 역사성·예술성·친환경성의 젓가락 문화상품을 만들자고 했고, 11월 11일 젓가락의 날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젓가락 선물하기 운동을 펼치기로 뜻을 모았으니 이만하면 이번 포럼은 매우 유익한 결실을 본 것이 아닐까.

산들바람 정원은 웃음꽃으로 가득했다. 삼겹살 굽는 사람, 이야기 나누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 춤추는 사람 모두가 한 여름 밤의 꽃이었다. 문화는 언어를 넘어선 언어라고 했던가. 자연과 사람이 하나되는 과정이 문화이기에 이 날의 일탈은 무익하지 않았다. 하산하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가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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