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손목시계 TV, 리모콘, 스마트폰, 무인자동차 그리고 자동지문인식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상용화되기 한참 전에 영화 007시리즈에 등장했던 첨단과학장비였다는 점이다. 지금은 대중화됐지만 영화 개봉때는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낮설은 스파이장비였다. 워싱턴포스트는 "007시리즈가 기술혁신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보도한 것은 상상력이 현실이 됐기 때문이다.

요즘엔 관공서에 흔히 쓰이는 자동지문인식기가 007영화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71년 개봉한 '다이아몬드는 영원히'다. 이 영화에서 제임스 본드는 가짜 지문으로 난관을 극복하고 임무를 무사히 마친다. 일본의 암호학자인 마쓰모토 스토모 교수가 젤리과자 재료로 본떠 만든 인공손가락으로 자동지문인식기를 무사통과한 것이 2002년인 것을 감안하면 30년전에 미래의 기술을 예측한 것이다.

우리나라 행정기관에 자동지문인식기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99년 6월이다. 당시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서울시 동대문구청에 지문과 신용카드를 인식해 신원을 확인하고 시간외 근무수당을 계산해 해당 공무원 은행계좌에 자동이체하는 기능까지 갖춘 첨단지문인식기 2대를 구청현관에 설치했다. 이런 첨단장비가 필요했던 것은 야근여부를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지 못해 비리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당시 구청기록에 따르면 자동지문인식기 설치에 1천만원 정도 예산이 들었지만 설치후 시간외 근무수당이 20%가량 줄어 비용이 절감됐다고 한다.

하지만 27년이 지난 지금은 초과수당을 훔치기 위해 제임스본드 뺨치는 수법이 등장했다. 작년 11월 해임된 경북의 소방공무원 2명은 실리콘으로 만든 자신들의 손가락 본을 부하 직원들에게 주고 야근을 한 것처럼 지문 인식기에 체크하도록 해 각각 300만원대를 챙기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놀라운 첨단기술도 직업윤리가 실종된 공무원들에겐 무용지물이다. 2년전 6월 밤 9시 충북도청 모 공무원은 혈중 알코올농도 0.154%의 만취 상태로 운전하다가 신호 대기 중인 차량을 뒤에서 들이받는 사고를 냈다. 경찰 조사를 끝내고 귀가 조치된 이 공무원이 간곳은 병원도, 집도 아닌 도청 사무실이었다. 그는 사무실 지문 인식기에 지문을 찍고 귀가했다. 음주사고라는 긴박한 순간에도 그의 뇌리속에는 야간근무수당이 맴돈것이다.

최근 제주도에선 도산하기관 공무원들의 초과근무수당 부당수령 조사가 주목을 받고 있다. 제주도자치경찰단도 내부 직원이 초과근무수당을 부정하게 수령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부서 소속 근무지가 여러 곳인 경우 해당 건물 어디서든 지문인식이 가능하다는 점을 악용해 자신의 실제 근무지 아닌 곳에서 지문인식기에 출퇴근 시간을 입력했다. 남 얘기가 아니다. 8년전엔 청주시도 변칙적인 수법으로 시간외 근무수당을 부당 수령한 공무원이 수백여명에 달해 전국적으로 망신을 당했다.

자동지문인식기가 초과수당 부정수령을 막는 장치가 될 수는 없다. 사무실에 CCTV를 설치해 근무여부를 확인하는 방안도 대안이 될 수 없다. 초과수당에 과도하게 연연하다 보면 허위근무에 대한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공직윤리에 충실하지 못한 공무원은 차라리 다른 직업을 선택하는것이 바람직하다. /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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