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체를 중간에 두고 만나는 사이, 오해와 선입견이 가득할 수밖에 없는 관계에서 섣불렀던 판단을 반성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을 설명하는 데 '알고 보니'라는 말 만큼 게으른 표현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탤런트 유인영(32)을 설명하는 데에는 가장 좋은 단어다.

악녀, 서브-여주인공, 착한 주인공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역할…, 대중의 머리에 각인된 유인영을 소개하는 것들이다. 입체적인 캐릭터 구축보다는 악녀에 대한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에 기대고 마는 진부한 캐스팅의 대상이 된 건 도도하고 화려한 외모와 앙칼진 목소리 탓이다.

그래도 유인영은 "나름대로 조금씩 변화를 주고 있다"고 했다. 올 초 끝난 KBS 2TV '오 마이 비너스'의 정 가는 악녀 '오수진'이나 MBC TV '굿바이 미스터 블랙'의 순수한 '윤마리'가 보기다. 한달음에 이미지를 바꿀 순 없지만 확실히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안 보여줬던 부분을 무기로 생각하고 조금씩 다가가면 된다"는 유인영을 만났다.

-한정된 이미지에 스트레스도 받았을 것 같은데, 이제는 그냥 해탈한 건가요?

"이런 고민을 하니까 한 선배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네가 항상 어중간하게 해서 그렇다고, 악역으로 정점을 찍어서 더 이상 보여줄 게 없으면 악역이 안 들어올 거라고. 그 순간 좀…. 사실 아예 '나쁜년'으로 보이는 게 싫었어요. 조금 귀여운 느낌을 보여주면 덜 미워 보이겠지 이런 계산도 했고요. 잘못된 생각이었던 거죠. 더 잘했다면 믿고 다른 역할도 줄 수 있었을 텐데요. 억울해한다고 달라지는 게 없잖아요. 할 수 있는 한 그 안에서 변화를 주면서 감사하게 해야겠더라고요."

-'나쁜년'으로 비쳐서 비난받는 게 두려웠던 건가요?

"연기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역할의 나쁜 짓이 말이 안 돼도 연기로 시청자를 설득해야 하거든요. 어떻게든 타당성을 만들어야 하는데, 욕을 먹는다는 건 제 연기가 부족했다는 얘기잖아요. 그런 면에서 욕을 먹는 게 아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싸리' 못되게 잘해서 욕을 먹는 거면 시원하겠다 싶기도 했고. 복합적으로 여러 생각이 들더라고요."

-'굿바이 미스터 블랙'의 '마리'는 어땠나요? 일반적인 '나쁜년'은 아니었는데.

"제 이미지 때문에 '마리'가 피해를 본 것 같아서 속상하기도 했어요. 나쁜 애가 아닌데, 괜히 제가 연기해서 '지원'(이진욱)이와 '선재'(김강우)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는 것처럼 보일까 봐 걱정도 됐고요. 두 사람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감정이 되게 힘들었거든요. 어쨌든 저한테는 새로운 걸 보여드릴 기회였죠. 뭔가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의욕이 넘쳐서 연기에 자연스러움이 부족했다는 반성도 많이 했고요. 그래도 조금씩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리고 있으니까, 다음에 또 다른 변화를 줄 때 보시는 분들이 덜 낯설어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렇게 차근차근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 뒤에 결국 하고 싶은 것은?

"저는 지금까지, '남자 둘에 여자 하나'류의 역할을 많이 했어요. 언젠가 문득, 주인공 욕심이라기보다는, '이 일을 시작하고 그만둘 때까지 한 번은 제 이름으로 타이틀을 가진 작품을 해야 하지 않겠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욕심인건 저도 아는데, 일을 시작한 이상 한 번쯤은 해야겠다고 욕심은 낼 수 있잖아요. 예를 들면 영화 '화차'(감독 변영주) 같은 거요. 김민희 선배의 연기를 보면서 저런 역할을 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나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그게 쉬지 않고 새 작품에 들어가는 이유인가요?

"지금은 그걸 생각하면서 노력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기회가 생겼을 때 뭔가 잘 맞아떨어져야 빛을 발할 수 있잖아요. 제가 가만히 있다고 목표가 이뤄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잡기 위해서 더 계속하는 것도 있고, 어쨌든 데뷔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꾸준히 일할 수 있는 건 행운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사실 힘들어서 널브러져 있고 싶기도 한데, 그게 잘 안 돼요. 저 혼자 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자신을 채찍질하는 편 같은데.

"네, 맞아요. 친한 분들은 다 알고, 너무 그러지 좀 말라고 얘기하시는데. 저는 항상 빡빡하게 살았어요. 즐기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어요. 그런데도 많이 가둬요. 성격이 좀, 남한테 피해 주는 걸 되게 싫어해요. 항상 그 부분이 조심스럽거든요. 그냥 민폐를 끼치는 게 너무 싫어요. 지금은 어떤 작품에 제가 나왔을 때, 저 때문에 작품 전체가 피해 본다는 말은 안 들었으면 좋겠어요."

-예능 프로그램에서 얼굴 보기 힘든 이유도 그런 성격과 관련이 있나요?

"괜히 프로그램에 민폐를 끼칠 것 같아요. 말도 느리고, 같은 얘기를 해도 제가 하면 재미가 없어요. 즐겁게 해야 하는데 저는 부들부들 떨고, 순발력도 없고요. 연기할 때도 머릿속으로 다 생각하고 가서 하는 편이거든요. '이 프로그램에 나가면 어떨까' 상상은 많이 하는데, 되게 FM적인 사람이라서 '그때그때 자연스럽게 하자' 이게 안 돼요."

-드라마에서 봤던 당당한 악역의 모습과는 정반대네요.

"제가 좀 서툴러요. 예쁘게 꾸며서 조리 있게 말하는 것도 잘 못 하고, 연기 외적인 모습이 비치는 거에 대한 부담감이나 공포감 같은 게 있어요. 제 모습은 드라마에서만 보여드리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열렸어요. 편안하게 다가가고 싶었고, SNS도 시작했고요. 요즘 같은 시대에 제가 고지식하고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억지로 따라갈 필요는 없더라고요. '제가 느린데 어떡해'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어요. 언젠가는 제 모습을 더 보여드릴 기회가 있겠죠."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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