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종

옷장 한켠에서 긴 잠을 자던 부채가 눈에 띄었다.

"일렁이는 태양이 숨을 막히게 하네요. 선생님도 많이 더우시죠? 이 부채는 더운 여름 시원하게 보내시라고 제가 특별히 부탁해서 제작된 거예요. 조만간 퇴임하신다고 하니 제 마음 한 구석이 무척 쓸쓸해요."

초 여름날 오후에 혜란이가 쪽지와 함께 놓고 간 사랑의 선물이다. 가끔 제자들이 쪽지 글을 접어 교무실 책상 위에 놓고 간다. 깨알 같이 적은 그 정성을 차곡차곡 쌓아둔 게 수십 통이 되었다. 퇴임 후 여러 해가 지나도록 펼쳐 보지 못했다가 오늘 부채를 펼쳐보며 불현듯 놈들이 보내 온 사연들이 보고 싶어졌다.

여경이는 내 이름 석 자를 놓고 삼행시를 짓고는 끝에 "선생님을 그리워 할 거예요" 라고 썼다. 그 얼굴이 이름만큼이나 아슴아슴하다. "선생님의 인기가 짱"이라고 애교를 떤 주리가 쪽지와 함께 놓고 간 사탕을 들고 나는 어린애처럼 즐거워했었다. "선생님 수필집 나오는 거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제일 먼저 살 테니 꼭 사인해 주세요." 민재 올림.

"선생님이 퇴임하시는 날이네요. 노란 장미가 예뻤지만 그건 영원한 이별을 뜻하는 것이라 대신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의미의 빨간 장미꽃을 샀습니다." 1학년 7반 실장 손원지.

나도 오늘따라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이 새삼 뵙고 싶어진다. 등수가 떨어졌다고 종아리 때려 주신 노상복 선생님은 지금도 술을 즐겨 드시는지. 시를 가르쳐 주신 신 선생님 묘소에는 잔디가 잘 자라고 있는지. 미스 코리아 대회에 입상하셨던 오 선생님은 화를 내시는데도 여전히 예쁘셨다. 돌아가신 유해정 선생님의 웃으시던 얼굴이 이렇게 서럽도록 그리워진다.

심난한 가슴을 추스르며 제자의 쪽지 글을 또 한 장 펼쳐든다.

"항상 웃으시며 어깨 두드려 주셔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라며 고마워하던 경미, "선생님의 수업이 참 재밌어요"라고 적은 일현이는 말미에 사랑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일현이 말대로 나는 정말 좋은 선생님이었을까? 아마도 그랬을 거라며 잠시 행복한 착각에 빠져본다. 그렇다. 분명 착각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칠판 앞에서 분필을 들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만은 즐겁고 행복했다.

나는 놈들의 얼굴과 이름이 뒤섞여져 실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친한 선배의 딸 은미의 성을 달리 불렀더니 그 뒤로 얼굴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예 이름 외우기를 포기해 버렸다. 실장 맡은 학생을 늘 "실장님" 이라고만 부르다가 어느 날 작심을 하고 이름을 불러주었더니 당장 쪽지가 날아왔다.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시다니,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했답니다."

봄바람이 꽃잎을 스쳐지나가듯 놈들은 그렇게 봄과 가을이 가고 겨울눈이 오면 졸업 앨범에 웃는 얼굴 한 컷 남기고 떠나간다.

변호사를 꿈꾸던 규진이와 형사가 되겠다던 원지, 나의 팬클럽 회장을 자임하던 선애는 기자가 되고 싶다고 했었는데 소원대로 꿈을 이루었는지. 모두가 '법과 사회'수업시간에 눈을 반짝이던 얼굴들이다. 가끔 수필을 읽어줄 때면 "선생님 글엔 선생님의 향기가 나요"라며 진한 애정표현을 하며 자주 찾아오겠다고 하더니 졸업한지 수년이 되었는데 아무에게서도 아직 전화 한통이 없다. 다만 제 얼굴을 기억해 달라던 유미만 웃는 모습으로 주고 간 사진 속에서 나를 응시할 뿐이다.

"나의 스승님, 그 분은 무대 위에 선 배우처럼 언제나 마지막 공연을 하듯 최선을 다 하셨다. 이야기 거리가 풍성하셨고 언어를 온 몸으로 표현하셨다~" 초등학교 교사가 된 선희가 보내온 글은 빼곡히 박아 쓴 글이 넉 장이 넘는다. 그는 학생들 앞에 설 적마다 푸른 바다 위 함선의 선장처럼 훌륭한 안내자가 되겠노라고 다짐한다며 글 말미에 "나의 스승님, 유인종 선생님처럼" 이라고 썼다. 칭찬을 하면 고래도 춤을 춘다는데 칭찬의 풍선이 이렇게 막 터질듯 하니 이쯤에서 거울을 마주보며 막춤이라도 추어야 할 것 같다.

길가에 피어 있는 분홍 장미꽃 사이로 6월의 바람이 분다. 바람은 장미의 향기를 마다하고 찬연한 계절의 속삭임을 외면한 채 그냥 저렇게 휙 스쳐서 간다. 인생이 다 그렇게 멀리 흔적 없이 사라져가는 바람인 것을…….

나 지금 여기서 홀로 애를 태우며 지난 날을 그리워함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한번 제자는 영원한 제자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한번 스승이 꼭 영원한 스승이어야 함은 지나친 나의 욕심일 것이다. 다만 "다정도 병인 양 하여 잠 못 들어 한다"던 옛 시인의 고백처럼 나 또한 자꾸만 잠자리가 뒤척여짐은 무슨 연고인가. 그래서 사랑보다 무서운 게 정이라 하나보다. 그 애틋한 정의 세월 속에 2만여 제자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오늘 부채 덕분에 모처럼 제자들과 어울려 추억의 동산을 거닐다보니 어언 서녘 하늘 햇살이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사제 간 정담의 행진 또한 긴 그림자 속으로 아스라이 멀어져 간다. 다만 예슬이가 주고 간 호야만은 거실 한켠의 삼각대 위에서 그 날의 풋풋한 싱그러움을 증언해 주고 있다.

머잖아 삼복의 열기가 더해지는 날, 나는 혜란이의 부채를 다시 펼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그려진 묵화의 향기 속에 놈들의 미소를 더욱 그리워 할 것이다. 혹 그 날에 이심전심으로 제자의 엽서 한 장 날아와 먼 하늘 응시하는 옛 스승의 시름에 젖은 가슴을 감싸 줄지도 몰라. 천천히 그리고 아주 부드럽게.

약력

▶'문학공간' 수필, 시 등단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연대 회원
▶대한기독문인회 회장
▶수필샘회장, 충북수필문학회장
▶저서 수필집 '별처럼 산처럼', '가을에 온 편지' 발간
▶youinch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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