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는 세계 금속인쇄문화의 메카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목판인쇄문화의 메카 역할을 하고 있다. 고려 충렬왕 31년(1305), 청주 원흥사(元興社·元興寺)에서 찍은 목판본 금강경(金剛經·원제 금강반야바라밀경)은 비록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본은 아니나 현존하는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보다 72년 앞서 찍은 고인쇄물이어서 직지를 보좌하여 인쇄문화 메카를 이끄는 보조 견인차로 손색이 없다.
 필자가 이 금강경을 접한 것은 3년전이다. 1999년 12월, 청주예술의 전당에선 「직지와 한국 고인쇄문화」라는 세미나가 열렸다. 이자리에는 경북대 남권희 교수가 참석하였는데 그는 문제의 목판본 금강경의 존재를 필자에게 귀뜀했다.
 육구거사(六具居士) 박지요(朴知遙) 등의 발원으로 인쇄한 이 금강경은 간기에 청주목 원흥사에서 목판본으로 다시 찍었음을 밝히고 있다.
 직지를 찍어낸 것이 고려 우왕 3년(1377)인데 이 금강경은 1305년에 인쇄한 것이므로 단순히 연대만을 비교하자면 직지보다 72년 앞선 인쇄물이다. 비록 목판본이기는 하나 청주가 인쇄문화의 메카라는 사실을 재차 입증하고 보완하는 자료여서 서지학적(書誌學的) 가치가 매우 크다.
 크기 27.1×16.3㎝ 크기의 비단 장정(책표지)으로 돼 있는 이 금강경은 서문, 본문, 후서를 포함하여 모두 51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간기에 대덕구년(大德九年·1305) 고려국 청주목 원흥사에서 개판(開板·다시 찍음)했다는 사실을 명기하고 있다.
 이 책은 조계종의 육조(六祖)인 혜능(慧能)이 번역(한역)하고 천태종의 나적(羅適)에 의해 원풍(元豊) 7년(1084)에 쓰여진 것을 1305년 박지요 등의 발원으로 청주목 원흥사에서 다시 찍은 것이다.
 그렇다면 인쇄장소인 원흥사는 어디쯤 있는 것일까. 정확한 위치는 아직 찾아지지 않았지만 조선 후기에 간행된 청주목 지도에 원흥제(元興堤)가 등장하고 있어 그 관련성을 따져봐야 할것 같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산남동 모주유소 뒷편 일대를 유력한 절터로 꼽고 있다. 이곳에는 이른바 「원흥이 방죽」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다 지난 1994년 충북대 박물관에서 실시한 일대 지표조사에서 옥개석, 탑신석 등 탑의 부재 일부와 토기편 수십점이 수습된바 있다.
 석탑 부재 일부만으로 일곳을 원흥사로 확정할 수는 없으나 지금까지의 정황을 종합해 보면 산남동 일대가 원흥사일 개연성은 매우 높다.
 산남동 3지구 택지 개발에 앞서 이 지점에 대해서는 필히 시굴, 또는 발굴조사를 실시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개발논리에 밀려 또다시 소중한 문화유산을 잃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곳에서 원흥사 절터가 밝혀진다면 흥덕사와 더불어 원흥사는 인쇄문화의 원조로서 그 빛을 발하고 청주를 문화도시로 가꾸는데 큰 몫을 할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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