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의 이야기가 있는 도보여행] 강원도 강릉 소금강계곡길

만물상 협곡

"길가의 수석이 깊이 들어갈수록 더욱 기이하고 눈이 어지러워 다 기록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 유학자인 율곡 이이가 소금강계곡을 다녀와서 쓴 기행문 '유청학산기'(游靑鶴山記) 한 대목이다. 그의 기행문을 읽은 전국 각지의 수많은 선비들 덕분에 소금강이 널리 알려졌다.

외가(外家)가 강릉인 율곡은 한양에서 그 먼 길을 걸어와서 강릉 오죽헌이 지척인 이곳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의 기행문이 말해주듯 오대산 동쪽 산기슭에 있는 이곳을 당시엔 '청학산(靑鶴山)'이라고 했던 모양이다. 학이 날개를 편듯한 형상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작은 금강산이라는 뜻을 가진 소금강(小金剛)이라고 한다. 일만일천봉이 선계처럼 황홀하게 서있는 금강산을 빼다 박았기 때문이다.

무릉계곡에서 백운대까지 코스를 걷다보면 헐리우드의 잘빠진 '블록버스터 영화'를 감상하는듯 하다. 흥행공식에 맞춰 제작돼 지루할만하면 어느 샌가 긴장과 흥미를 고조시키는 명품 '스릴러'처럼 숲의 터널을 빠져나오거나 다리를 건너면 탄성을 자아낼만한 전혀 예상치 못한 비경(秘境)이 툭툭 튀어나온다. 금강산의 '일란성 쌍둥이'이라는 별칭이 마음에 와 닿는다. 연주담(蓮舟潭), 구룡(九龍)폭포, 만물상(萬物相)은 금강산에 있는 풍광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하다.

우리가 간 날은 날씨도 도와주었다. 장마전선이 소강상태를 보였다. 외려 폭염을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오대산국립공원 소금강분소로 가기전 마지막 쉼터인 진고개 휴게소에 잠시 내리니 찬바람에 팔에 소름이 돋았다. 선선한 초가을날씨였다.

이곳은 소금강계곡의 반대편 출발지이기도 하다. 산악회에서 온 수십명의 등산객들이 버스에 내려 노인봉((해발 1338m)를 향해 줄지어 올라갔다. 이들은 노인봉대피소를 거쳐 소금강계곡으로 내려가는 코스를 택한 것이다.

구룡폭포

하지만 우리는 소금강탐방지원센터를 들머리로 삼았다. 전날 장맛비에 하늘은 청명하고 바람은 싱그러웠다. 걷기엔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계곡을 끼고 편안한 오솔길을 걷다보니 연화담이 나왔다. 금강산에 있는 연주담(蓮珠潭)을 닮았다. 떨어지는 물의 출렁임이 연꽃모양을 닮았다고 연화담이라고 했다는데 유심이 보니 그럴듯했다.

그 길옆에 천년고찰 금강사가 있었다. 삼국유사 탑상(塔像) 편에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에 등장하는 사찰이다. 국가의 건승을 위해 오대산 동ㆍ서ㆍ남ㆍ북, 그리고 중앙에 각각 위치한 5개 사찰에서 각각 결성됐다는 신앙결사 중에서도 남방의 남대(南臺)가 있던 곳이 바로 금강사였다.

유서 깊은 사찰이지만 규모는 작다. 깊은 계곡에 접해있어 옛날엔 수도정진(修道精進)하기 참 좋았겠지만 지금은 등산객들이 많이 다녀 분위기가 산만한 절이 됐다. 금강사 앞 계곡의 큰 바위에 '소금강(小金剛)'이라 새겨져 있는데 율곡의 글씨라는 말도 있지만 함께 길을 걸은 국문학자는 돌에 새긴 글씨의 마모상태로 볼 때 1900년대 초기에 누군가 새겨 넣은 것 같다고 말했다.

계류는 물이 맑아 투명했다. 식당암(食堂岩) 부근과 삼선암(三仙岩) 언저리는 운동장 같은 바위가 장관이다. 신라의 마의태자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군사를 모아 훈련시키며 밥을 해먹였다고 해서 식당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데 깊은 산속에 이렇게 너른바위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금강송을 감상하며 바위협곡과 계곡을 잇는 다리를 건너면 구룡폭포가 나온다. '눈감으면 한 폭포수 소리인데 눈뜨면 아홉 폭포'라는 시 구절처럼 9개의 크고 작은 폭포가 이어졌다. 그곳에서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굉음을 내지르며 수십 미터의 절벽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잠시 무상무념(無想無念)에 빠졌다. 관광차 온 사람들은 대개 이곳에서 회귀(回歸)한다. 하지만 우리는 얼음물로 목을 축이고 만물상으로 향했다.

식당암

도보여행을 좋아해 1664년 관동 일대를 유람하고 '파동기행'이라는 기행일기를 남긴 윤선거는 그해 3월 남종열, 이원례와 함께 셋이 청학산에 들어갔다. 이때 이원례가 율곡집을 휴대해 세 사람은 율곡이 지은 '유청학산기' 속의 기록을 더듬어 갔다. 난 10여년전 금강산을 방문한적 있다.

윤선거 일행처럼 소금강길에서 금강산을 발견하고자했다. 만물상은 우뚝 솟은 바위들이 흡사 금강산의 만물상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졌다.

이중 귀면암(鬼面岩)이 눈길을 끌었다. 사람의 형상을 닮은 거대한 바위산은 우리나라에선 흔치않다. 만물상에서 선녀탕을 거쳐 백운대로 올라가는 협곡은 무척 이국적인 풍경이다.

소금강은 1970년 명승지 제1호로 지정되었을 만큼 절경이다. 다른 코스에선 한두번 볼까 말까한 진기한 풍경이 잊을 만 하면 등장한다. 무릉계곡에서 만물상까지 걸은 시간은 3시간30분이지만 도보여행의 여운(餘韻)은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율곡의 마음을 사로잡은 선계의 풍광은 수백년이 지나도 여전했다. / 논설실장·대기자

▶출발지 = 강원도 평창군 병내리 진고개휴게소에서 시작해도 되지만 산길이 멀고 노인봉까지 볼만한 풍경은 아니다. 오대산국립공원소금강분소에서 시작해 체력에 맞게 만물상이나 구룡폭포까지 다녀오는 것이 적당하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