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창조경제팀장

상선약수(上善若水).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거나 욕심내지 않고 낮은 곳에 머물기에 도(道)에 가깝다. 노자에 나오는 이 말은 사람이 마땅히 취하고 따라야 할 존재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헤르만 헤세는 "네가 궁금한 게 있으면 흘러가는 강물에게 물어라. 그러면 강물은 웃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시인 장석주는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그 많은 아침들과 고요한 순간들, 위로와 희망이던 음악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꽃들과 사랑은 왜 빨리 시들고 사랑하는 이의 미소는 왜 오래 머물지 않는지를 흐르는 강물에게 물어라. 그러면 강물이 웃으며 답할 것이다"라고 노래했다.

햇살이 눈부시고 산천은 초록빛으로 가득하다. 밤엔 풀섶에서 우는 풀벌레 소리 드높고 새들과 매미들의 합창은 단잠을 깨운다. 어느 시인은 진정한 예술활동은 자연을 닮아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자연은 무엇을 할 것인가 망설이지 않는다. 버려야 할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솟아야 할 때는 엄연하게 새순 돋는 아픔을 허락한다. 그래서 자연은 맑고 고요한 존재다. 길을 걸으며, 산을 오르며, 들판을 오가며 만나는 자연을 통해 새로운 삶의 향기와 용기를 얻는다. 거짓과 위선과 욕망으로 얼룩진 자신에게 채찍을 가하기도 한다.

그래서 진정한 예술은 자연을 닮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어떤 그림이 가장 좋은지 단언할 수 없지만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을 담았거니 그런 노래를 들으면 왠지 마음이 고요해지고 차분해진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때도 그러하지 않던가. 동심은 자연과 같기 때문이다. 선악의 분별이 없고 알고 모름의 경계가 없기 때문이며, 아무 꾸밈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삶을 담았기 때문이다.

문의면 소재지에 있는 마불갤러리의 이종국 씨는 닥나무와 닥풀로 전통 한지를 만드는 사람이다. 최근에 이어령 선생님의 아이디어로 씨앗종이를 만들었는데 그 과정이 극적이고 생명의 존엄성을 담고 있다. 한지는 닥나무 껍질과 닥풀을 찌고 두드리며 물에 풀어 종이를 뜨는 등의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 한지 속에 닥나무 씨앗을 넣는 과정도 더 치밀한 기술이 있어야 한다. 온 종일 땀을 흘리며 한지속에 씨앗을 넣었지만 만족할만한 성과품이 나오지 않았다. 기술적 오류가 있었음을 확인하고 다시 시작해야 했으며, 실패한 것은 쓰레기통에 버렸다.

다음날 아침, 갤러리 문을 열었는데 신기한 일이 펼쳐졌다. 휴지통에 파릇파릇 새싹이 움트고 있었다. 전날 쓰레기통에 내동댕이처진 한지 속에서 새 생명이 꼬물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실패한 것이라고 말할 때, 허망하고 초라한 절망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허겁지겁 쓰레기통에 버렸을 때,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면서 불안감에 밤잠을 설쳤을 때 씨앗은 포기하지 않고 새 생명을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곳이 쓰레기통이든 담벼락이든 시멘트 바닥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생(生)은 하느님이 주신 명령(命令), 그래서 생명(生命)이라고 했듯이 절망의 끝에서 생명을 찬미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어령 선생님은 생명문화도시 청주의 위대함을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라며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의연히 일어났던 시민들처럼, 절멸위기의 두꺼비 서식지를 시민의 힘으로 살려낸 것처럼, 금속활자를 만들어 정보혁명의 신기원을 일궈낸 것처럼, 청주시민이 하면 세계가 감동하고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민들은 실패를 기념하고 위대한 성장통을 허락하자고 했다.

우리의 가슴 속에는 시련과 실패의 이랑이 있다. 이랑이 분명할수록 강건해진다. 사람은 시련과 실패 속에서 단련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낙담과 실망으로 얼룩진 사람은 일찍 늙지만 아픔을 딛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사람은 더 큰 삶을 만들어 갈 것이다. 생명문화도시 청주는 이처럼 자연 속에 있는 생명의 비밀을 찾는 일, 새 순 돋는 아픔을 견디는 일부터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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