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민정 수필가
서양에서 "토마토가 빨갛게 익을 무렵이면 의사의 얼굴이 파랗게 변해버린다"는 속담이 있다. 토마토를 많이 먹으면 의사도 필요 없을 정도로 건강이 좋아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어린 시절 더운 여름날, 학교 갔다 돌아오면 엄마는 미리 설탕에 재워 차갑게 식혀 둔 토마토를 꺼내주셨다. 달콤하고 시원한 과육을 포크로 찍어 흘릴세라 접시에 대고 허겁지겁 먹어치우고, 남은 과즙을 서로 들이마시겠다고 동생과 머리를 맞대고 실랑이하던 기억, 껍질도 과육도, 안팎이 똑같이 빨간 토마토는 추억이다.
근교에서 토마토 비닐하우스를 대단위로 경작하는 친구로부터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토마토를 갖다먹으라" 는 전갈이 왔다. 농장에 가보니 주변은 5만평의 농공단지에 하얀 비닐하우스가 파도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친구는 못난이 토마토 수십 박스를 담아놓고 친구들을 맞이했다. 사시사철 토마토 농사에 매달려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깡마르고 까무잡잡한 피부는 건강한 구릿빛을 띠고 있었다.
가끔 일간지를 통해 친구의 친환경농사법을 소개하는 기사가 일면을 차지할 정도니 주변에서도 성공사례의 주인공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때때로 친구의 기술이나 경영방식에 벤치마킹을 오기도 하고, 귀농인들에게 멘토가 돼어 농장은 종종 교육장으로 변한다고 했다. 현재 그는 1만평 규모에 연매출 8억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하니 괜히 내가 부자가 된 것 같아 뿌듯했다. 가지마다 탐스럽게 열린 토마토를 보고 한 친구가 "돈다발이 주렁주렁 달려있네" 하며 너스레를 떨자 "농사는 돈의 논리로만 생각하면 실망도 커지지, 가격파동이나, 천재지변으로 큰 손해를 볼 때마다 애정과 자부심이 없었다면 벌써 포기 했을 거야, 그저 자연과 함께 살며 자신을 내려놓아야 이 생활을 견뎌 낼 수 있어".
요즈음은 전자상거래도 많아지면서 공부도 하고, 토마토 생산·유통뿐 아니라 가공업체로 확장중이다. 친구는 세상이 변하는데 농민도 농사도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몇 년 후에는 융복합 산업 농장으로 체험시설 확장을 위해 관계기관과 협의 중이라는 일장연설에 그저 우리는 그애 입모양만 따라다녔다. 오랫만에 시골의 목가적인 정취에 머리나 식힐 겸 찾아 간 농장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싱싱한 토마토를 다섯 박스나 차에 싣었다. 돌아오는 길에 지인들을 찾아 선물을 하고 남은 한 박스를 들고 둘째 올케에게 갔다. 재작년 중병을 잘 이겨내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싸우고 있는 올케는 토마토가 항암작용에 좋다는 말에 반색했다. 박스를 개봉하자마자 토마토를 살짝 익혀 어린애 달래듯이 정성을 다해 벗겨 놓는다. 토마토의 연분홍 속살들이 생명의 살처럼 느껴졌다. 올케가 하루속히 병을 훌훌 털고 일어나길 기도하고 있다. 삶과 죽음의 간극에서도 신앙의 끈을 꽉 붙잡고 견뎌내고 있는 그녀를 볼 적마다 온몸에 시나브로 녹아있는 신앙의 힘에 위대함을 느낀다.
농사는 기다림이다. 봄이 오길 기다리고, 싹이 나길 기다리고, 열매가 맺길 기다리고, 그 열매가 익어야 비로소 결실을 본다. 인생도 기다림의 연속이다. 연인의 기다림, 성공의 기다림, 완쾌의 기다림, 어차피 기다림의 연속이라면 기다리는 법을 잘 배워야 인생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오래 기다려서 받은 것일수록 더 큰 기쁨을 준다. 친구에게 토마토는 30여년 긴 기다림의 포상이었다.
나도 어느 덧 은퇴의 나이가 되었다. 일찌감치 꿈도 버리고 그저 현실에 만족하며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포기하며 살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다행이다. 지금부터라도 버린 꿈을 잡아 볼 것이다. 그냥 밥그릇이 아닌 빛을 말이다. 겉으로는 대단하게 드러나지 않아도 나보다 더 수고하고 나의 힘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어디이든 가장 큰 존재의 이유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오늘 토마토의 붉은 빛깔처럼 가슴도 달아 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