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민정 수필가

모네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주술에 홀린 것처럼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다. 특히 수련연작이 그렇다. 안개나 반사된 빛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색감이나, 모네만의 두터운 붓터치는 황홀경에 빠지기에 충분하다. 백내장으로 노란색과 붉은색만 볼 수 있었던 왼쪽 눈과 수정체가 없었던 오른쪽 눈으로 보라색만 볼 수 있었던 클로드모네. 이맘때가 되면 그의 그림은 내 기억 속에 남아 물의 정원을 그리워하며 신열을 앓는다.

그 빛과 색감을 찾아 부여 궁남지로 향했다. 7월의 연못에는 곳곳마다 화양연화를 이루고 있는 홍련 백련의 황홀한 자태에 기억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걸음걸음 마다 스쳐가는 기분 좋은 바람, 무엇보다도 이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 아, 언제나 그랬듯 행복이란 참으로 작은 것들 속에 깃들여져 있다. 순간의 빛과 그늘, 습지와 수양버들, 내 마음의 뜨락까지 충만하게 들어 온 드넓은 연못은 정지된 듯 한 고요 속에서 꽃을 피워내느라 가장 분주했다.

중국 사상가 주돈이는 애련설(愛蓮說)에서 "연꽃은 진흙에서 피어나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고 잔잔한 물결에 씻어도 요염해지지 않네. 그 향기는 멀리 퍼져도 오히려 더욱 맑으며 고고하고 꼿꼿하여 멀리서 볼 수는 있으되 함부로 가지고 놀 수 없어라" 라며 연꽃을 화중군자(花中君子)라 예찬했다. 연꽃은 충과 절개를 지키는 선비의 군자다운 태도에 비유해 꽃 가운데 군자라는 호칭을 얻었으며 세상의 오염을 탓하지 말고 그 속에서 아름답고 순결한 꽃을 피운다는 의미도 담겨있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로맨스를 기대하며 '포룡정' 정자 다리를 건넌다. 그들의 은밀한 밀회를 탐하기라도 한 듯 쫑끗 세운 연꽃잎들이 사랑스럽다. 렌즈 안에 연꽃을 새겨 넣느라 사진작가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푸른 하늘아래 공명하는 분홍빛 순정과 하얀 순결미는 연꽃만이 간직한 은총이었다. 무성한 가시로 무장한 보랏빛 맵시로 연못 속에서도 젖지 않은 가시연꽃, 꽃자리마다 영근 연밥들, 화각 안에 잡히는 것마다 그림이고 예술이었다. 꽃들의 아름다움은 내가 상상했던 그 밖에 있었다.

삶이 많이 흔들리고 있었을 때 지인에게 연꽃사진을 선물로 받은 적 있다. 그는 내게 연꽃은 화과동시(花果同詩) 식물이라 했다. 꽃과 열매가 동시에 맺는 꽃은 원인이며, 열매는 결과라며, 나의 과거가 원인이 되어 나의 현재가 되고, 나의 미래는 현재의 나의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했다. 내 삶의 모든 결과가 내게로 오듯 그 원인은 모두 나에게 있음을 깨달으라는 뜻이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마다 상대방을 탓하고 하늘을 원망하며, 마음의 가시를 세웠던 날에 지인의 지혜로운 선물 덕분에 가시밭길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마음이 복잡할 때 짙은 물음표 하나를 물고 이곳을 찾을 때면 언제나 현답을 주는 궁남지는 연꽃말처럼 '그대에게 소중한 행운'을 안겨주는 자비의 연못이다. 작은 씨알하나가 성장하고 꽃을 맺기까지 때가 오기를 서두르지 않아도 스르륵 문을 열어 꽃을 피우는 연꽃처럼 이제 서서히 중년의 고개를 넘어서고 있다. 인간과 자연은 오래된 숨박꼭질 놀이다. 나는 언제나 술래를 자처하며 자연 속에서 많은 의미를 찾아내어 지혜를 터득한다. 오늘도 단 하나의 빛나는 길을 걸었다. 행복하고 풍요로움을 안고 오는 돌아오는 길이 내일이면 꿈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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