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칼럼] 논설실장·대기자

얼마전 사석(私席)에서 만난 대한사격연맹 고위인사는 "이시종 지사를 다시보게 됐다"며 지난 7월 사격대회에서 있었던 가벼운 에피소드를 전해주었다. 리우올림픽을 앞두고 청주종합사격장에서 열린 2016 한화회장배 전국사격대회에 초청인사중 가장 먼저 온 사람은 이 지사였다. 연맹측이 개막식 단상으로 자리로 안내하려하자 이 지사는 완곡히 거절하며 입구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한참을 서 있다가 맞이한 사람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었다.

함께 개막식에 참석한 뒤 VIP들과 함께 티타임을 가진 자리에서 이 지사는 김 회장에게 충북이 공장설립의 최적지라는 당위성을 설명하며 계열사를 이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지사가 간곡히 설명하는 동안 묵묵히 듣고 있던 김 회장은 회사관계자에게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이날 자리를 함께한 이승훈 시장은 김 회장에게 한화이글스의 청주경기 횟수를 늘려달라고 했다고 한다. 연맹 고위인사는 기업유치 대한 집념이 그렇게 대단한 광역자치단체장은 처음 봤다며 혀를 내둘렀다.

이 지사는 목표를 정하면 집요하고 끈질긴 면이 있다. 본인이 재벌회장에게 머리를 조아릴 정도면 도청 실·국장들은 얼마나 힘들지 안 봐도 비디오다. 이들은 자리를 누리기는 커녕 기획안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현장을 뛰어다녀야 한다. 청주와는 역사적인 연고성도 전혀 찾을 수없는 무예를 소재로 세계무예마스터십대회를 여는 것도 그렇다. 이 지사는 "올림픽 최초의 개최지가 아테네이듯이 무예올림픽 최초가 청주가 될 것"이라며 "50년, 100년 뒤 청주는 무예의 성지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말은 좋지만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행사라 이 지사의 눈에 들기 위한 오랜 준비과정은 고행(苦行)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행사의 성공여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일단 개막은 했다.

이런 이 지사가 요즘 궁색한 처지에 몰렸다. 충북의 '100년 먹거리사업'이라는 '청주 항공정비사업(MRO)' 무산이라는 대형 악재(惡材) 때문이다. 공을 들였던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경남 사천에 빼앗기고 대안이었던 아시아나항공은 공수표만 날렸다. 올 생각도 없는 기업도 끌어와야 할 판에 오기로 약속한 회사가 포기를 선언해 이지사의 리더십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이 지사와 전상헌 충북경제자유구역청장의 가장 큰 책임은 'MRO 무산'이 아니라 1년7개월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도민들에게 근거 없는 희망만 불어넣은 채 행정력만 낭비하고 시간만 허비했다는 점이다. 아시아나항공은 작년 말 경영정상화이후 고강도 구조조정을 추진해왔다. 이 때문에 자금 여력이 없는 아시아나항공은 이미 한참 전에 대규모 투자가 수반되는 MRO 사업에 부정적이었다는 것이 업계의 정설이다. 충북은 팔짱만 끼고 있다가 뒤통수를 얻어 맞은 격이다.

아시아나 항공의 사업포기가 무예마스터십대회와 직지코리아페스티벌 개막 직전에 발표돼 잠시 묻히겠지만 행사가 끝나면 언제든 수면으로 떠오를 사안이다. 3선 도전을 선언한 이 지사에겐 쉽지 않은 난관(難關)이 될 것이다.

뒤돌아보면 이 지사는 무난하게 충북도정을 이끌어 왔다. 무상급식 예산분담 문제로 김병우 충북교육감과 상당기간 대립각을 세웠으나 결국은 자신의 의도대로 마무리 지었다. 새누리당이 다수당인 도의회와도 당초 우려와 달리 적당히 '밀당'하면서 자기페이스로 이끌어왔다. 초선에 전반기 2년간 온갖 풍상을 겪어 온 이승훈 시장과 비교된다. 이 지사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완벽주의자 같지만 정치적으로는 매우 노회(老獪)하다. 필요하다면 재벌 회장에게 허리를 굽힐 수 있는 인물이다. 대규모 이벤트 행사를 끊임없이 개최하면서 복지부동한 공무원들을 쉴새 없이 몰아부치고 도민들에게 도지사가 열심히 일한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이런 리더십도 롱런의 비결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지사에겐 결정적인 한방이 부족하다. 충북의 미래를 규정할 수 있는 비전이 없다. 그렇다고 이시종 하면 떠오르는 업적도 없다. 충북은 아직도 이원종 전지사(현 대통령 비서실장)가 씨앗을 뿌려놓은 오창과 오송단지의 IT·BT전략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이 지사 취임이후 충북은 '태양의 땅'이라는 캐치플레이스를 걸고 태양광산업 유치에 올인 했지만 별재미를 못보았다.

MRO사업은 수년간 변죽만 요란하게 올리다가 망신만 당했다. 국제적인 이벤트행사도 때론 필요하다. 하지만 이 지사가 너무 이벤트에 집중하다보면 충북도와 도민의 미래 보다는 차기 선거 전략에 치중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이 지사가 정말 선택과 집중해야 할 것은 100년은 아니더라도 30년간은 충북의 성장엔진이 될 먹거리를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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