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창조경제팀장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집요하게 흔들어 놓더니 태양만 설핏해도 찬바람이 파고든다. 들녘은 황금빛으로 물들었지만 고샅길의 잡풀들은 쇠잔하게 사그라지고 있다. 머잖아 산천은 붉은 물감을 풀어놓을 것이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저마다의 길을 갈 것이다. 자연은 이처럼 엄연한데 사람의 마음은 정처없다.

솟대명인 조병묵 선생께서 보따리를 허리춤에 끼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칠순을 넘긴 당신이 직접 짜고 다듬고 칠한 책꽂이와 손으로 쓴 편지를 내게 선물했다. 책을 읽지 않는 나라는 희망이 없다며 남은 여생은 솟대만들기와 책꽂이 기증운동을 하겠다는 포부를 이야기 했다. 책꽂이에 책이 가득하면 책장으로 옮길 것이고, 이렇게 수없이 반복되면 책으로 가득한 세상이 될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을 담은 것이다.

조병묵 선생은 중등학교 교사로 활동하다가 사설 우체국의 국장으로도 일했다. 지금은 20년째 솟대만들기에 전념하고 있는데 다양한 디자인과 재료적 기법과 옻칠까지 더하면서 솟대미학이라고 할 정도로 예술적 기량이 뛰어나다. 거리와 공원, 도시의 공간 곳곳에 당신이 직접 설계한 '솟대의 꿈'으로 아름답게 물결치는 그날을 준비하고 있다. 당신은 인생 이모작이 아니라 3모작을 하고 있는 셈이다.

충북도청에서 국립청주박물관쪽으로 오르막길을 가다보면 우측에 '서향컬렉션'이라는 작은 가게가 있다. 중년의 여인 김서향 씨가 운영하는 공방이다. 김 씨는 결혼 이후 주부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의 엄마로만 살아왔다. 지천명을 훌쩍 넘긴 어느 날,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니 아쉬움과 미련과 슬픔이 밀려왔다. 나라는 존재가 있는지, 앞으로도 이런 삶을 계속해야 할지 가슴이 먹먹했다. 그래서 도자기를 배우고 자수를 배우고 분재도 배웠다. 재미와 감동이 밀려왔고 배우는 족족 익히고 새로움을 더할 수 있어 행복했다. 자신에게 예술적 재능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갱년기에 우울증까지 있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해졌다.

김 씨는 몇 해 전 이곳에 공방을 차렸다. 자신이 직접 디자인하고 공간을 꾸몄다. 그동안 만들어 놓았던 도자기와 조각보 등으로 연출했다. 주부들에게 바느질을 가르치고 비엔날레 기간에는 시민도슨트로도 활약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고 했던가. 문화 현장에서 자신의 꿈을 빚고 다듬으며 펼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귀찮게 공방일을 왜 하느냐고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가족들도 응원하기 시작했다. 며느리는 자신에게 물려달라며 침을 흘리고, 무뚝뚝하기만 한 남편도 공방을 기웃거린다. 작은 도전에 자신의 인생과 가치관, 그리고 미래까지 바꾸어 놓은 것이다.

여자는 나이와 함께 아름다워진다고 했던가. 여자이기 때문에 아직도 아름다울 수 있고 아직도 자신의 꿈을 변주할 수 있으며 아직도 사랑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김 씨 뿐만 아니다. 청주에는 '땀 앤 땀'이라는 규방공예 동아리가 있다.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자신들의 꿈을 깁고 이야기 꽃을 피우는 아줌마들의 모임인데 디자이너 이상봉 씨의 패션쇼 의상을 제작하는데 함께했으며 해외전시에도 참여하는 등 작품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100세 시대의 소망이 무엇일까. 안정적인 직장, 행복한 일상, 아프지 않는 삶 등이 아닐까. 그렇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돈과 건강과 삶의 문제 모두 불안하다.

세상은 급변하고 후배들은 달려오고 노후는 준비된 것이 없다. 늙었다고 찬밥 신세 될까 걱정부터 앞선다. 조병묵 선생과 김서향 씨의 이야기는 갈 길 잃은 실버문화의 비전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가끔씩 드라마에서, 라디오에서 노사연의 '바램'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등에 짊어진 삶의 무게가 온몸을 아프게 하고… 어느 날 갑자기 세월의 한 복판에 덩그러니 혼자 있진 않겠죠….' 그러면서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것'이라며 노년의 아픔을 고매한 성찰로 승화시켰다.

길섶의 코스모스가 푸른 하늘을 향해 은유의 꼬리를 물고 오른다. 인간의 삶도 조금씩 맑고 향기롭게 익어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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