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이종혁 감독의 데뷔작인 스릴러물 「H」는 설정에서부터 몇몇 헐리우드 스릴러들을 익숙하게 환기시킨다. 만삭의 임산부, 레즈비언, 임신한 여고생, 산부인과 의사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잇단 연쇄살인 사건이 10개월 만에 재연된다. 사건 열쇠를 쥔 인물은 6명을 죽이고 자수, 형무소에 수감됐던 22살의 살인마 신현. 냉철한 김형사와 젊은 혈기의 강형사가 남녀혼식조를 이뤄 그와, 그의 악마적 영향력 아래 진행되는 살인을 저지하기 위해 분투한다.
 이러한 설정은 「양들의 침묵」「세븐」 혹은 「카피 캣」「프라이멀 피어」등과의 가까운 거리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방을 통한 창조」라는 먼 길을 택한 감독은 인물들의 감정이 살아나는 스릴러로서 차별화를 시도하고자 한다. 즉 나름의 완결적 논리를 갖춘 연쇄살인마의 범죄행각이 주변 인물들의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원죄의식과 상처를 아프게 건드리는 일종의 공명(共鳴)현상에 주목하는 것. 그래서 죽이는 자와 죽임을 징벌하는 자, 혹은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간의 분명한 경계가 사라지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악의 영역으로 내몰리는 비극적 경로를 관찰한다. 마지막 해변가에서 벌어지는 최후의 살인장면이 우울함이 극도로 강조된 비극적 정조로 마무리되는 것도 이 때문이겠다.
 하지만 「H」는 스릴러가 관객 지지를 받기 위해 얼마나 정교한 극적구조를 필요로 하는가를 알려주는 반면교사가 되고 있다. 우선 반전의 작동을 위한 복선과 몇몇 설정들이 오히려 극의 원활한 진행을 방해하고 인물의 일관성을 저해하는 것은 피했어야 했다. 또한 언제나 뒤늦은 각성으로 관객이 내러티브를 따라잡기 위해 분주한 것이 스릴러의 묘미라고 해도, 제 때 적절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다면 게임을 계속하는데 필요한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H」처럼 극 중반 넘어 반전의 실마리를 흘리고 다닌다면 더 이상 팽팽한 심리적 긴장감이 유지되기도 어렵다.
 하지만 「H」의 정작 심각한 문제는 도무지 그 살인들이 하등의 정당성도 얻지 못한다는 점이다. 물론 세상에 정당화될 수 있는 살인이란 없다. 다만 현실과의 차단벽이 설치된 스릴러장르의 극적 맥락 속에서 때로는 살인도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우리들 마음 속에 자리잡은 악의 뿌리, 혹은 사회라는 거대한 악의 병리구조를 폭로하고 질타하기 위해 그 용서받지 못할 행위가 활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임신했거나 낙태한 여자들을 향하는 「H」의 증오는 결코 균형잡힌 것이라 할 수 없다. 낙태가 용서받을 수 없는 살인행위라는 고발, 혹은 그같은 살인행위가 버젓이 자행되는 사회를 질타하려는 의도가 선명할수록, 성 상품화와 만연한 인명경시풍조의 또 다른 피해자인 여성들만을 향한 증오는 너무 일방적이다. 그녀들을 임신시킨 남성들이 그녀들을 차가운 수술대 위에 혼자 오르게 하고 사라진 뒤, 부정한 어머니에 대한 아들들의 분노만 부각되는 영화의 카메라는 분명 온당치 못한 것이다.
 당초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여성에 대한 가학적 증오가 선명한 영화에서 더욱 아쉬워지는 건 여형사 미연이라는 캐릭터다. 상실의 아픔을 간직한 그는 신현과의 대면에서 끝내 눈물을 떨군다. 단정한 와이셔츠와 넥타이, 헐렁한 재킷과 바지라는 중성적 매무새 안에 감춰진 「사랑에 빠졌던 여자」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 하지만 참혹한 연쇄살인극을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그녀의 성적 정체성은 어떤 변수도 되지 못한다. 모든 살인을 마감짓는 그녀의 마지막 행동 또한 애인의 죽음과 연관된 모종의 슬픔과 연민만 잔뜩 묻어날 뿐이다.
 남성과 함께 내린 그릇된 선택에 대한 응징을 다시 남성들로부터 받아야 하는 여성들의 잇단 죽음 앞에서도 우리의 여주인공은 자신의 슬픔에만 빠져있다. 그러니 아무 위로도 받지 못하고 응분의 응징조차 없이 세상을 떠난 수많은 여성들의 명복을 빌 밖에.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