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김호일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사무총장
팔덕선(八德扇)과 팔용선(八用扇)을 아시나요? 필자에게 올해 여름 청주에서 특히 자주 만난 것 하나를 꼽으라면, 그것은 단연 '부채'일 것이다. 서울이나 외국에서 살던 터라 잊고 살아간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금년여름 청주에서 부채를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제는 일상에서 멀어져 잊혀져가는 부채의 여덟 가지 미덕을 일컬어 '팔덕선'이라 하고, 여덟 가지 용도로 쓰인다고 해서 '팔용선' 이라고 지칭한다.
이처럼 여름철에 그 존재를 나타내곤 하는 부채에는 단순함 속에 깃 든 놀라운 효용(效用)이 숨어 있음을 새삼 발견한다. 요즈음은 선풍기와 냉방기의 보급으로 부채도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그러나 가끔은 멋들어지게 합죽선을 펼치며 멋과 운치를 만끽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대부분 예술의 전당 무대위나 공연장에서 만나는 정도라 아쉽다. 부채는 우리의 전통문화이기도 하고, 반드시 지켜야 할 전통문화유산이다. 이제는 그림에서나 만나는 선비들의 한복에 무척이나 잘 어우리는 '합죽선'은 언제보아도 아름답다. 동양화나 서화(書畵)한 폭이 그려진 부채를 부칠 때 나는 바람은 시원함에 앞서 분명히 다른 멋이 서려있다.
합죽선(접는 부채)은 더워서 부채질 할 때뿐만 아니라 참으로 그 효용성이 다양하다. 부채의 무한한 쓰임새에도 불구하고 한갓 더위 쫓는 도구로만 생각된 탓에 소외되어 안타깝다. 통칭 부채로 불리는 합죽선의 용도는 무엇일까. 우리 전통문화의 진수라 할 수 있는 '판소리'에는 빠질 수 없는 것이 부채이다. 부채 하나로 멋지게 효과를 살린다. 펼치면 책이 되었다가 접으면 칼이 되는 것이 소리판의 부채의 역할이다. '줄타기'를 할 때에도 부채를 펼쳤다 오므렸다 하면서 균형을 잡았다. 굿을 할 때 무당들은 부채를 펼쳐들고 휘두르면서 잡귀를 몰아내기도 한다.
어디 그 뿐이랴. 화가나 서예가들에게는 부채가 그들의 예술적 창조력을 표현하는 훌륭한 화폭이며 화선지이다. 거기에는 시(詩)가 있고 그림이 있고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글씨가 있다. 한편 원두막에 앉아 오수를 즐기는 노인의 얼굴을 간질이는 파리와 모기 등을 쫓기에 충분하고, 얼굴 덮개로도 쓰며, 햇빛을 가릴 수도 있고, 불을 피울 때 바람을 일으키며, 사나운 개를 만나면 호신용으로 쓰기도 하고, 길을 묻는 나그네에게 설명할 때나 방향을 가리키는 지시봉으로도 활용하고, 등이 가려우면 등 긁는 효자손으로도 쓰인다.
보기 싫은 사람 만나면 자신의 얼굴을 가릴 때도 쓰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합죽선 하나로 시원함은 물론, 일상생활에 아주 요긴하게 쓸 수 있다.
가을의 초입에서 굳이 필자가 부채를 이야기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바로 작가 한지작가 '이종국'이다. 그는 지금도 청주 '문의면' 공방 '마불 갤러리'에서 여전히 부채를 다듬고 있다. 아니 그는 사철 쓰이는 '바람을 담고' 있다. 그는 부채를 만들 때 대나무를 쓰지 않고 '산초나무'를 쓴다. 그는 종이를 사서 쓰지 않는다.
직접 닥나무를 씨 뿌려 재배하고 키워서 한지를 만들어 부채를 만든다. 그의 부채는 평면이 아니다. 그의 부채는 둥글다. 그의 부채는 인생이며 삶이다. 그의 가슴에는 스며드는 아름다움이 있고, 언제나 선비가 있고 스승이 있고, 이웃이 있고 세계가 있다. 그의 부채는 세계인이 좋아하고 세계인은 그의 부채를 단순예술의 경지를 넘어 '삶과 전통의 예술'로 인정한다.
지난여름 그와 함께 몇몇이 밥맛 좋기로 유명한 일본 '니가타'에 갔을 때의 일이다. '니가타'는 일본에서 가장 쌀의 품질이 으뜸인 곳이 '니가타'지방이다. 이곳은 쌀이 좋으니 술이 좋을 것이고, 술이 좋으니 축제가 많을 것이고, 축제가 많으니 풍류와 문화가 발전 할 수밖에 없는 도시임을 한눈에 알 수가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작가 '이종국'은 일본인의 눈을 사로잡았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종국의 부채에는 호랑이가 있고, 거북이가 있고, 민속이 있고, 한민족의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날씨가 더워서 바람을 일으키기 위한 부채가 아니라, 그는 바람을 담아 바람을 나눌 줄 아는 베품의 부채를 만들고 있다. 그에게는 반드시 '하루쯤 묵어가야만 느끼는 산사의 아침처럼' 정갈하고 신비한 우리의 문화를 잇고 더하고 성숙시켜가는 고집스런 정신이 있어 훌륭하다. 필자가 만나본 많은 전업 작가와 명인 명장을 포함한 지역 문화인들 중에서도 그는 우리가 '자랑해야하는 지역문화인'으로 단연 으뜸 반열이 아닐까 싶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