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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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며칠 앞둔 1992년 12월 15일 새벽 부산 초원복집에 말쑥한 차림의 중년남자들이 모였다. 이들은 경찰청장, 안기부지부장, 검찰지검장, 상공회의소 회장 등 부산 주요 기관장들이었다. 이날 비밀모임을 주도한 김기춘 전법무부장관은 강한 어조에 나직한 말투로 "지역감정이 유치한지 몰라도 고향발전에는 긍정적이다. 이번에 김대중이나 정주영이 어쩌고 하면 부산·경남사람들 영도다리에 빠져 죽읍시다.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돼. 좀 노골적이어도 괜찮지. 뭐" 부정선거를 단속해야할 법무부장관의 충격적인 발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함구했다. 하지만 밀담(密談)은 금방 들통났다. 정주영 후보의 국민당이 부산기관장들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식당에 미리 녹음기를 설치한 것이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요즘은 달라졌다. 듣는 정도가 아니라 바로 녹음파일로 저장된다. 도청장비가 발달한데다 스마트폰으로도 얼마든지 녹취가 가능해 사적인 대화도 순식간에 전국민이 들을 수 있다. '난 네가 지난 여름에 한일을 알고있다'는 공포영화 제목처럼 과거에 했던 발언을 당사자는 잊었는지 몰라도 언젠가는 결정적인 순간에 공개되는 사례는 흔하다.

녹음파일로 숫한 정치인들이 추락했다.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도 2013년 5월 당원회합에서 "전쟁을 준비하자, 정치군사적 준비체제를 갖춰야…"라고 말한 녹취록 때문에 통진당은 해산됐고 그는 내란선동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지난해 2월엔 이완구 전총리가 취재를 하러온 기자들에게 "언론인들은 내가 대학총장도 만들어주고…"라며 은근히 언론에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한 내용이 녹음돼 국무총리 인사청문회에 공개됐다. 국무총리 내정자가 한말 치고는 천박했다. 그는 가까스로 청문회 문턱은 넘었지만 성완종리스트 파문에 취임 63일만에 옷을 벗었다. 정치인 녹음파일 사건에는 윤상현(새누리당) 의원도 단골로 등장한다. 그는 4·13총선 직전인 지난 3월8일 '김무성 죽여버려'라는 전화녹음이 공개돼 당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는 살생부 보도에 격분해 실언했다고 했지만 당내 공천갈등의 단초를 제공하면서 새누리당 총선참패의 배경이 됐다.

최근 10년전 녹음파일로 인생의 분기점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인물이 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인 도널트 트럼프다. 트럼프와 미 연예매체 '액세스 할리우드'의 빌리 부시가 과거 버스 안에서 나눈 지극히 외설적 대화 내용이 담긴 녹음파일이 공개돼 선거판을 뒤흔들었다. 음담패설 녹음파일은 그동안 막말을 일삼아 온 트럼프의 대선 가도에 급제동을 걸었다. 공화당 수뇌부조차 등을 돌렸다. 물론 최악의 진흙탕 선거에 힐러리도 흠결이 많지만 트럼프는 너무 심했다.

선거는 최선이 없다면 차선을 뽑거나 최악을 피해 차악을 뽑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언행이 일치되는 존경받는 정치인을 찾기 어렵다는 말도 된다. 정치의 세계에선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공인의 길에 들어 섰다면 자나 깨나 입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녹음파일 때문에 지금이 아니면 먼 훗날이라도 한방에 훅 갈수도 있으니까.

/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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