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수필가

김민정 수필가

스페인하면 투우와 플라멩고가 떠오른다. 스페인 여행에서 아쉽게도 투우는 보지 못했지만 플라멩고를 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저녁 무렵, 플라멩고를 관람하기 위해 세비아의 소극장으로 입장했다. 어슴프레한 불빛 아래 좌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로 혼잡했다. '상그리아' 한잔으로 목을 축이고 있는데 잠시 후 화려한 드레스에 짙은 화장을 한 무희들이 무대 위로 등장했다.

남자의 기타연주와 혼을 부르는 기묘한 노래가 시작되자 무희가 허공을 쏘아보며 주름장식이 달린 치맛자락을 모아 쥐고 현란한 발동작으로 점점 빠르게 스탭을 밟는다. 춤이 끊어졌다 힘차게 이어지고 나풀대는 물방울무늬의 스커트자락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구두에 박힌 징소리가 엇박자내며 숨 가쁜 소리를 내자 내 심장도 함께 뛰었다.

애절한 노래가 유랑의 한을 달래며 응어리를 풀어내자 무희가 가장 고독한 얼굴로 가장 화려한 춤을 추었다. 이어 남자 무희가 현란한 발동작으로 스탭을 이어간다. 발이 안보일 만큼 빠른 탭으로 장발이 땀에 흥건하게 젖는다. 춤에 취한 관객들 모두가'올레'하고 추임새를 넣자 춤은 더욱 격렬해진다.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집시의 눈에서 빛이 쏟아져 내렸다. 야릇한 격정의 빛이다.

그 빛을 보니 낮에 알람브라 궁전으로 가는길에 차창밖으로 보았던 사크로 몬테 동굴이 생각났다. 15세기 무렵, 동쪽에서 온 집시들이 안달루시아 지방에 정착하였지만 자신들은 악마로 취급당했다. 어디를 가든지 외면당한 집시들은 생계로 방물장수를 하면서 춤과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 플라멩고 라 한다. 이들은 마을의 벽에 회칠을 한 어두운 동굴 속에서 한이 서린 노래를 부르고, 불꽃같은 춤을 추며 슬픔과 비통함을 승화시켰을 것이다. 고향을 등지고 편견과 차별 속에서 유랑하는 집시의 삶은 동굴처럼 고독하고 깊었다. 알람브라 궁전과 사크로 몬테의 극단적인 대조가 그들을 더욱 고독한 눈빛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결혼 후 뿌리를 두고 떠나온 미지의 세계는 론다의 누에보다리 만큼이나 절벽이었고 마음은 정착하지 못하고 떠다녔다. 큰 시숙의 사업실패로 온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어 형제들은 저마다 시린 설산에서 지난한 시간을 보내야만했다. 절박한 심경으로 친정을 찾아갔다. "출가 외인이다. 너희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거라" 아버지의 얼음장 같은 음성은 울컥울컥 목울대까지 차오르는 섭섭함으로 고향의 뿌리를 자르고 애증으로 가득 찼었다. 그라나다 대성당 근처에서 집시가 로즈마리 한 가닥을 주면서 손금을 봐 준다며 다가 왔다. 가이드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알고 보니 그녀들은 소매치기를 하기도 하고 손금을 봐 준 다음 20유로를 내 놓으라고 한단다. 돈을 못주겠다고 하면 상대방을 노려보면서 '말 데 오호(mal de ojo)'라고 저주를 건단다.

"우주에는 영원한 주인은 없다. 모든 것은 다 신의 소유다. 우리가 물건을 가져가는 것은 도둑질이 아니라 신의 물건을 잠시 빌려 쓰는 것이다" 집시들의 억지이야기는 영원히 뿌리를 내리고 싶은 아우성일지도 모른다. 스물일곱 해를 고향에서 살았고 또 서른 한해를 이곳에서만 살았다. 돌이켜보면 아버지의 애증어린 말 한마디가 새로운 가정에 뿌리를 내리는데 가장 큰 밑거름이 되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현실을 이기지 못할 때 마다 집시가 되어 친정집을 찾아가 방랑했을 것이다. 이제는 지나온 시간만큼 더 깊은 곳에서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되었다. 이제 나도 춤을 추어야겠다. 붉은 한을 풀어내는 집시의 춤이 아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탱고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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