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창조혁신팀장

변광섭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창조혁신팀장

이른 아침에 신발 끈을 동여매고 대문을 나섰다. 햇살이 어둠을 비집고 쏟아지기 시작했다. 찬바람이 어깨를 툭 치고 달아나니 설익는 낙엽이 흩날렸다. 새벽마다 산행을 하는 것이 귀찮기도 하지만 계절의 순환을 온 몸으로 즐길 수 있는 행복감을 상상하면 설렘이 앞선다. 이렇게 십 수 년을 일상과 새로움의 경계를 넘나들며 낯선 오감으로 세상을 노래했다.

일 년 열두 달 중 시월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마당가 느티나무는 하루가 멀다며 제물에 갈색 잎을 밤낮으로 쏟아 놓는다. 골목길 담장 너머에는 붉은 홍시가 아슬아슬한 뒤태를 자랑한다.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그토록 찬연하던 숲도 야위고 귀뚜라미 울음도 야위어 간다. 길을 가다가 낙엽이 바스락거리기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다. 세월이 건들마처럼 설렁설렁 지나가버릴까 두려워 발걸음을 재촉한다.

시월은 이처럼 대자연이 시간을 다투며 변화하듯이 우리의 삶도 생성과 소멸의 다양성을 갖고 있다. 사유의 보궁이라고 할까. 어줍은 지식의 잣대로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는 신묘함이 있다. 문화현장 곳곳을 누비며 삶의 향기를 만들기도 하고 헛헛한 마음을 달래기도 한다. 서점으로 달려가 책 몇 권 가슴에 품기만 해도 마음이 들뜬다. 숲길 물길 들길을 따라 한유로운 시간도 즐긴다. 이 사소한 일상이 우리에게 문 없는 문을 향해 가는 수행의 길이다.

이번 시월은 가슴에 남는 일들이 유독 많았다. 청주시문화재단과 상생충북이 함께 개최한 문학콘서트는 지역 출판계와 동네서점의 생태계를 건강하게 하고 지역의 문화원형을 특화하며 인문학의 가치를 살리기 위한 행사였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엿보며 지적 자양분을 쌓고 삶의 지혜와 용기를 얻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글을 쓰고 책을 펴내는 일은 내 삶의 흔적으로 남기고 내 영혼의 향기를 만들며 내 인생의 마디와 마디를 강건하게 하는 성스러운 행동이다.

청주공예페어는 공예에 대한 시선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었다. 인류의 태동과 함께 삶의 도구로, 생활양식으로, 아름다움 추구하는 욕망의 결정체로 공예는 우리 곁에 있었다. 화려했던 시대에는 유미주의적 찬란한 문화가, 암울했던 시대에는 담담하고 정갈한 공예품이 유행했다. 하여 공예는 시대를 담는 그릇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 시대의 공예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400여 명의 색소폰 군단이 펼친 가을밤의 콘서트. 연초제조창과 첨단문화산업단지를 배경으로 펼쳐진 '시월愛 금빛바람'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웠던가. 낡고 거칠고 야성적인 공간에서 색소폰 400여 대가 품어내는 육탈의 소리는 인간이기에 가능하고, 인간이기 때문에 할 수 있고, 인간으로서 즐길 수 있는 신의 선물이었다. 누가 예술은 고등사기라 했던가. 예술을 배경으로 한 창작활동은 마음껏 사기를 쳐도 좋다. 즐거움 가득한 세상, 삶의 존재가치를 느끼게 하는 에네르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월이면 어김없이 기다려지는 것 중의 하나가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다. 올해의 주인공은 미국의 포크 가수이자 음유시인 밥 딜러다. 그는 남들이 시적인 표현을 노래에 담고 있을 때 반전·평화·저항정신을 노래했고 문학과 음악의 경계를 허물었으며 이를 통해 지구촌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감동을 선사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황할 때는 고심참담(故心慘憺)의 시간을 가질 것을,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의연히 일어설 것을, 진실된 사랑과 우정과 행복을 위해 어깨동무할 것을 노래했다.

오늘 밤, 그의 노래가 내 가슴을 때린다.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은 바다를 건너야 모래밭에서 편안히 잠들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포탄이 날아가야 영원히 포탄 사용이 금지될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답은 불어오는 바람속에 있다네." 다시 바람이 분다. 독수리의 눈으로 나를 보고 따뜻한 시선으로 이웃을 보듬으며 창조의 가치로 내일의 문을 두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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