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 우병우 … 문고리 3인방에 '발목'

박근혜 대통령의 트레이드 마크는 '원칙과 소신'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자신이 생각한 바를 고집스럽게 밀고나간다. 가볍지 않고 진중한 성격을 말해준다. 이명박 정부때 세종시 수정론이 부각 됐을 때 원안을 밀어붙여 관철시킨 예가 대표적이다. 박 대통령이 35% 안팎의 콘크리트 지지층이 형성됐던 것은 '원칙과 소신'도 한몫했다. 여성 정치인이지만 믿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얼음공주'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한번 눈 밖에 나면 회복되기 힘들다. 누구도 믿지 않고 주변에 아무나 두지 않으며 2인자 없이 혼자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 박 대통령이 지난 25일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랫동안 친자매처럼 지내왔던 최순실씨에게 대통령 연설문 등을 사전 유출한 것에 대해 잘못을 인정한 것이다. 의외다. 중요한 일은 남에게 믿고 맡기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알려졌다. 하지만 '최순실씨'에게는 예외였던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소문으로만 돌던 '비선실세'는 이렇게 세상에 드러났다. 박 대통령은 사과문 발표 말미에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맺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옆에 서있던 이원종 대통령비서실장의 눈도 충혈 됐다. '레이저 눈빛'이 상징하는 '강인한 여성상'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현장에 있던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수근거렸다고 한다. "(대통령이) 이제까지 저렇게 약한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다". 그날 대통령은 날개가 꺾였다.

하지만 그 시간 정작 참담함을 느낀 사람은 대통령뿐만 아니다. 국민들도 마찬가지다. 리더십이 실종된 대통령의 모습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박 대통령 임기는 절반이 훌쩍 지났지만 아직 1년4개월이 남았다. 하지만 지지율은 연일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지금 절박한 상황이다. 며칠 전 발표한 개헌논의 말고도 북한 핵·미사일의 실질적인 위협,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성장률 저하, 경제위기에 따른 글로벌 생존경쟁 등 산적한 현안이 대통령 집무실 책상에 쌓여있다. 약화된 국정동력으로 위기를 헤쳐 나가긴 힘들 것이다. 당연히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감내해야 한다.

알려진대로 최순실씨 의혹은 미르·K스포츠재단에서 시작됐다. 이들 재단은 국내 대기업들로부터 무려 900여억이나 되는 재단 출연금을 챙겼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전례 없이 이틀 만에 재단 설립을 허가해줬다. 국내굴지의 재벌기업들이 앞 다퉈 수십억 원의 출연금을 낸 것도 그렇지만 재단법인 설립과정이 힘들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에겐 의문투성이로 비쳐질 수 밖에 없다.

설립 1년여가 된 재단직원들의 평균 연봉이 9천212만원으로 보도됐다. 현대자동차 평균 연봉(9천600만원)에 육박하는 금액이다. 대기업이 귀족노조라는 말을 듣지만 고액연봉은 근로자의 피와 땀이 서린 귀한 노동의 대가다. '권력'을 앞세워 보이지 않는 손으로 대기업에 압력을 넣어 천억원에 가까운 출연금을 받아 직원들에게 고액연봉을 안겨준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25일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천935만명 임금근로자중 거의 절반이 월급여 200만원도 못받는다. 서민들이 얼마나 팍팍한 삶을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권력형 비리로 모은 돈으로 억대에 육박하는 연봉을 준다면 서민들은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힘을 등에 업은 최순실씨의 '자금유용과 불법행위'는 고구마줄기처럼 끊임없이 돌출돼 국민들의 마음을 암울하게 짖누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병우 청와대민정수석의 직권남용과 횡령혐의도 수개월째 쟁점이 되고 있지만 아직도 변한것은 없다. 청와대는 외려 감찰내용 유출을 구실로 '국기를 문란시켰다'며 이석우 특감에 칼날을 겨눴다. 송민순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를 놓고 벌이는 여야 공방도 점입가경이다. 북한측의 견해를 물어 봤다는 대목에 대한 문재인 전 대표의 어설픈 대응은 유력 대권후보의 안보문제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켰다. 국민들은 혼란스럽다. 불평등한 사회구조, 불통의 정치, 정의롭지 않은 국가현실은 권력형비리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삼포세대 젊은이들에게 더 큰 충격과 절망감을 안겨줬다.

문제는 온 나라가 최순실·우병우 의혹, 송만순 회고록등에 발목이 잡힌 사이에 한국경제가 깊이 가라앉고 있다는 점이다. 내수침체와 대우조선과 한진해운동 구조조정 실패, 글로벌 시장에서 삼성전자·현대자동차의 부진 등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한국경제를 '퍼펙트스톰(두 가지 이상의 악재가 동시에 발생하는 금융·경제 위기 현상)'의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있다는 점이다. 실물경제 위기를 맞으면서 체감경기도 추락하고 있다. 구조적 저성장 국면이 이어지면서 각종 경제지표도 일제히 빨간불이 깜박이고 있다.

이 와중에 가계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최근 한국은행 발표에 따르면 1분기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총 1223조6천700억 원으로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후로도 가계부채 증가세는 계속돼 연말에는 1천300조 원을 돌파하리란 전망까지 나온다. 서민들이 부채에 짓눌려 깊은 한숨을 토해내고 있다.

하지만 국민들에게 희망을 줘야할 정치는 각종 권력형 비리스캔들로 구심점을 잃었다. 대통령이 리더십을 발휘해야 난국을 돌파할 수 있지만 그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자신의 패착(敗着)으로 눈물을 훔치며 한없이 나약한 모습으로 변한 대통령이 국가적인 난제를 풀어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 여야간 정쟁도 극에 달하고 있다. 대한민국호는 침몰할 지경인데 정치인들은 무능과 분열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때문에 국민들은 불안하다. 국민들의 불안감은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대통령 선거는 아직 1년 이상 남아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서민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이젠 정치권이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정쟁대신 지혜를 모아 난국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경쟁력을 상실한채 표류하고 국민 삶의 질은 더욱 척박해 질 수 밖에 없다.

/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