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경구 아동문학가

김경구 아동문학가

벽에 걸린 달력이 달랑 두 장 남았습니다. 한해가 벌써 다 가는구나, 조금은 서운할 쯤 내년 달력 하나를 받았습니다. 벌써 달력이 나오나 봅니다. 요즘 달력은 모양도 크기도 다양합니다. 간혹 흔해서 그런지 안 쓰는 달력이 한두 개쯤 남게 됩니다. 하지만 예전엔 달력이 참 귀했습니다.

어린 시절 새 학기가 되면 아버지는 장롱 위에 잘 보관하던 지난 해 달력을 꺼내 책표지를 싸주셨습니다.

당시 달력은 지금처럼 도톰하지 않고 얇아서, 아이들은 서로 좋은 달력을 차지하려 싸움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책 보고 훌륭한 사람 되라고 했지, 벌써부터 싸움질이냐며 호통을 치셨습니다. 곱게 달력으로 싸주신 책은 한 학기 동안 잘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도시락 반찬인 김치 국물이 흘러도 끄떡없었습니다. 달력이 책을 보호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빤질빤질한 달력이 참 좋았습니다. 빤질빤질한 달력은 껌 덕분에 인기가 더 좋았습니다. 당시 귀했던 껌은 한 번 씹고 버리지 않았습니다. 밥 먹고 씹고, 놀다가도 씹고, 심심해도 씹었기 때문입니다. 씹던 껌은 다음 날 또 씹기 위해 주로 달력에 붙어 놓았습니다. 붙였다가 다시 떼어 씹을 때 달력은 똑, 깔끔하게 떨어져 씹기 좋았습니다. 반면 벽에 붙이면 벽지가 달라붙어 씹기가 조금 불편했습니다. 군데군데 벽지가 뜯겨져 나간 모양도 안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집 달력은 빤질빤질한 널따란 달력을 걸어놓았습니다.

그리곤 아버지는 달력 중심이 잘 잡혀 걸렸는지 한두 발짝 뒤로 물러서서 달력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럼 저는 볼펜으로 가족 수만큼 동그라미를 그려놓았습니다. 바로 이 동그라미 안에 씹었던 껌을 붙여 놓으라는 표시였습니다.

아, 달력에는 멋진 양복을 입은 남자와, 예쁜 옷을 입은 여자의 모습들이 많았습니다. 조금 커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달력에는 주로 노주현 씨와 이영하 씨, 장미희 씨와 유지인 씨였습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명절을 쇠러 가는 모습을 시작으로 서로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한 손에는 목이 긴 투명한 잔을 들고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 달력을 볼 때 그들이 모두 부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목이 긴 술잔이 똑 끊어질까봐 은근 신경이 쓰였습니다. 또 하나 정장을 입은 여자들은 달력 속에는 왜 모두 다리를 꽈배기처럼 꼬고 있는지 신기했습니다.

간혹 친구네 집에 가보면 지난 달력 사진을 잘 오려 벽에 붙인 경우도 보았습니다. 그럼 저는 늘 그 벽에 말풍선을 그려 놓고 싶었습니다. 다 쓴 달력은 왕 딱지를 접기도 하고 큰 종이비행기를 접거나 모자를 만들어 쓰고 놀았습니다. 중학교 때는 달력 숫자를 오려 신발장 번호로 붙여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탁상달력을 좋아합니다. 이 달력에 약속이나 생일 등을 써 놓고 한눈에 보기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 달력을 버리지 못하는 편입니다. 그 달력에는 저의 지난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달 말일이면 새 달력을 펴고 생일과 기념일 등을 잘 찾아 표시해 둘 것입니다. 모쪼록 새 달력에도 좋은 일들로 가득 메모되어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