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는 인구가 이동을 하는 채집경제의 시대이고 신석기는 비로소 정착을 하여 농경문화를 일으키던 생산경제의 시대이다. 경제행위의 이같은 변화는 구석기와 신석기를 가르는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 관련하계에서는 이를 ''신석기 시대의 혁명''이라 부른다.
 신석기 시대에는 뗀석기(타제석기)가 간석기(마제석기)로 바뀌고 드디어 토기가 등장한다. 농경생활에 있어서 곡식이나 물 등을 담는 그릇은 필히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의 토기는 밑바닥이 평평한 ''평평밑 토기''와 원추형의 ''뾰죽밑 토기''가 있었는데 시기적으로 먼저 등장한 것은 ''평평밑 토기''였다. 그러나 대종을 이루는 것은 역시 ''뾰죽밑 토기''였는데 보기에도 불안정한 뾰죽밑을 왜 만들었을까 궁굼증이 인다.
 신석기인들은 대개 해안가나 큰 강가를 따라 정착하였기 때문에 집터 바닥을 보면 모래바닥이 많다. 바로 뾰죽밑 토기를 모래바닥에 끼워 놓기만 하면 대단히 편리하고 안정성을 갖게된다.
 당시의 토기는 섭씨 800도에서 구워진 연질토기인데 토기를 구울때 그릇의 표면에 빗살무늬를 규칙적으로 새겨 넣었다. 당시에도 미(美)의식이 작용했던 것이다.
 빗살무늬 토기는 무늬의 생김새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서울 암사동에서 발굴된 토기는 빗살무늬가 곱고 가늘다. 이에비해 부산 동삼동 출토 토기는 무늬가 굵고 다소 거친 맛을 준다. 그래서 관련학계는 빗살무늬의 굵기에 따라 ''서울 암사동식'' ''부산 동삼동식''으로 분류해 왔다.
 고고학의 이런 분류법도 충청도 지역에서 적용하기엔 약간 혼선을 준다. 양쪽 계열의 빗살무늬 토기가 함께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를 두고 ''충청도식 빗살토기''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기도 한다. 한발 더 나아가 고전적 분류법에 대한 재검토가 있어야 한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최근에 와서는 출토지점과 신석기 시대의 상한선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일반적으로 빗살무늬 토기인들은 해안선이나 큰 강가를 따라 삶의 터전을 일구어 온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와 다른 사실들이 연이어 나타나고 있다.
 지난 1995년 충북대박물관이 상당산성 남문앞 일대를 발굴조사하였는데 놀랍게도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가 쏟아져 나왔다. 큰 하천도 없는 산 기슭에 신석기인의 흔적이 나타난 것이다. 빗살토기편은 내륙 깊숙한 괴산 목도 등지에서도 수습되었으며 최근에는 제천 신월동에서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신석기시대의 주거지와 반달 돌칼 등이 나왔다.
 신석기 유적이 해안과 큰 강가에 밀집해 있는 것은 물과 물길의 확보에 있는데 내륙 깊숙이 진출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인구의 증가및 적극적 경제활동에서 우선 해답을 구해봐야 할 것이다. 제주 고산리유적을 보면 신석기의 상한선도 기존의 5천년에서 8천년~1만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학술적인 기록 또한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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