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김호일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사무총장

김호일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사무총장

 이제 '문화융성'이란 말 자체를 버려야하는가? 앞으로 문화도시 청주는 어떤 비전을 가져야하는가? 최근 나라의 모든 도시들은 문화도시를 지향해오면서 지역적으로 문화적으로 행복하고 즐거운 곳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최근 언론에 보도되는 불미스러운 사건들로 인해 문화도시, 문화융성은 이제 그만둬야 하는가? 공정하지 못한 문화정책, 사회적 양극화로 인해, 이제 막 꽃을 피워가는 전통문화와 지역문화 까지도 배제한 체, 부정과 부패가 문화 분야에까지 파고들어 썩어있는 모습을 보니 한숨만 나오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돌이켜 생각을 해보면 '문화가 돈이 된다는 것'은 몇몇 사람들의 생각이었고 욕심이었던 20여 년 전부터 문화는 어쩌면 병들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이른바 소위 한류(韓流)를 하면서 남의 문화는 무시하고, 우리 문화만을 주장 또는 강요하며 아울러 십대후반의, 한창 배우고 익혀야할 아이들을 '아이돌'이라고 칭하면서 무대 위로 끌어들여 돈벌이에 연연한 그 인연들이 모모기획이며, 모은택이고, 모성각이라는 사람과 회사들이 아니었던가. 이 모든 피해자는 우리 국민, 시민, 지역민들이 아니랴.

그야 말로 돈에 속고 정부의 홍보에 속은 것은 아닌가. 따라서 작금의 운동 신경이 거의 마비된 상태의 정부를 바라보고 절망에 직면한 국민들의 분노를 무엇으로,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문화 분야에서 일해 온 필자도 '나는 과연 책임이 없는가.' 되돌아보게 된다. 분명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아간 국민들 가운데는 문화와 예술인들도 많을 것이다.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가 국민과 시민의 분노에 동참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문화적 업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눈치를 보거나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을 위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온전히 다하고 있느냐'라는 것이 아닐까.

'최순실'이 가져온 '문화붕괴'의 핵심 요소로는 첫째,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차관 등 고위 공직자들까지도 부패에 동참해서 저지른 악행으로서의 예산배분이며, 그 결과로 국가와 재벌 대기업 동맹형태로 지역문화말살을 가져왔다. 둘째, 지역문화와 지역문화인재의 산업적 참여권 박탈과 일자리를 무자비하게 뺏어갔다. 셋째, 지자체의 자생적 문화원형적 자원들을 묵살하고, 부정부패를 위한 신생기업에 지원을 몰아줌으로써, 예술적이고 자유로운 문화시민의 나라사랑과 지역사랑에 대한 미래의욕마저 상실하게 했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예측가능한 문화정책을 펼침으로써, 지역시민들에게 문화가 미래에 대한 상상력과 기쁨을 만드는 토대가 되어야만 한다. 정작 21세기가 문화의 시대라고 말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문화와 예술이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인식이 만연하다. 문화와 예술이 자본과 권력에 의해 여전히 경제발전의 모순을 피해가기위한 국가통치의 수단으로 간주되고 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그 증명으로써 최근에 벌어지는 '최순실 사태' 등은 문화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좌절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의 목표는 '시민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우리의 지역문화는 유럽이나 미국을 위한 것도 아니요, 관광객을 위한 것도 아니다.

우리와 지역을 사랑하는 시민들의 일상생활에서 진정한 행복을 제공하기 위한일이 되어야만 한다. 왜, 이 나라는 정치가 경제의 발전에 발목을 잡으며, 경제가 문화를 돕지 못하는 걸까? 아무튼 새삼스럽게 즉 문화도 쉽게 부패하고 또한 너무도 쉽게 좌절하면서 권력의 도구로서 이용된다는 현상을 중심으로 볼 때 문화의 역할을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이러한 서울 중심의, 콘텐츠 공급자 혹은 정책입안자 중심의 관점에서 시작되는 부패의 관행이 지역에서 수용자적 입장에서는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하려는 노력이 필요한바 바로 이러한 노력의 핵심단어는 '지역중심'과 自省이 아닐까 싶다.

'지역중심'이라는 말이 너무 식상함은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안했다는 말의 반증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누리고 발전시킬 모든 문화 혹은 문화적 행위의 시작과 끝은 지역이 될 수밖에 없으며, 자성은 잘 알다시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의심과 추론을 통해서 불합리하거나 비합리적인 관행들, 문화행정들에 대해서 수술을 해야 함을 뜻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다시금 지역의, 지역에 의한, 지역을 위한 문화정책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것이 문화융성의 시작이고 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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