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민정 수필가

김민정 수필가

 겨울 성마른 바람이 얼굴에 온기를 거두어갈 때면 온 누리에 자박하게 깔린 박명(薄明)은 아우성치던 낮을 조용히 가라앉힌다. 모든 생명이 사기(死期)에 이른 듯 숨을 죽였다. 그믐밤은 깊어가고 한 폭의 수묵화가 펼쳐지는 이 시간이면 조각조각 나누어져 있던 고향의 풍경이 한데 어우러져 애뜻한 그리움으로 파도처럼 밀려온다.

 된바람에 철 대문이 덜컹대고 샘가에 있던 양은 세숫대야가 마당을 굴러다니며 시끄러운 소리를 낼 때면 이불 속에서 혹은 다락방에 올라가서 박계형 소설의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과 '동짓달 그믐밤'을 숨어서 읽었다. 한창 사춘기에 호기심 강한 나는 아직 자아실현의 완성도가 미약한 나이였지만, 대부분이 불륜이거나 이루어질 수 없는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고, 처음으로 느껴보는 야릇한 감정이었다. 다소 황당한 설정과 갈등의 요소에 열다섯 살 나는 달떴고 사랑을 품었다.

 톨스토이와 섹스피어 전집, 아르센 루팡 전집에 빠져 있던 나는 박계형 작가의 '동짓달 그믐밤'을 읽을 때면 어머니의 젖무덤같이 넉넉하고 포근했다.

 질펀한 충청도 사투리 대사는 더디게 살아가도 괜찮을 것 같고, 갈등은 있지만 인정이 있고 빈곤했지만 비굴하지 않다. 매일 밤 전집에 파묻혀 미래에 찾아 올 사랑을 꿈꾸며 모노드라마를 연출하기도 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새로움을 갖기 위해 옛것을 아낌없이 버려야 하는 법도 배웠다. 그렇게 밤바람을 타고 피어나는 홍매화처럼 나는 숨어서 피어났다. 박계형 작품은 세상에 그 어떤 방법으로도 풀 수 없는 사랑의 방정식을 쉽게 풀 수 있는 비법을 찾아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질곡의 세월을 살아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른 게 없는 것 같다. 고향에는 지금도 나이가 들어 세상으로 떠난 사람들 말고는 대부분이 그대로 고향을 지키고 살아가고 있다.

 얼마 전 고향 소식이 들려왔다. 더부실에서 시집온 그녀는 내가 결혼하기 전에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마을 우물가 옆에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한쪽귀가 어둡고 건강도 온전하지 못한 남편과 노모를 모시고 살았다. 작은 키에 동그란 얼굴, 부지런한 그녀 덕에 집안은 점점 온기를 찾았으나 불행히도 아이가 없었다. 몇 년이 지나 아이도 입양하고, 새집도 짓고 차도 구입해 나름대로 잘 사는 줄 알았는데 쉰 중반을 넘긴 나이에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숫한 세월에도 빛이 바래지 않을 것 같았던 그녀에게 한지에 먹물이 스며들 듯 질곡의 어둠이 빛깔도, 소리도, 풍경도 모두 무채색으로 만들지 않았나 싶었다.

 그래도 남은 가족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올해의 동짓달은 어느 해 보다도 시리고 아프다. 우리의 대통령은 식물 정치가 되었고, 한국 경제는 세계6위에서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지킬 것이 많다는 것은 잃을 것도 많다는 것이다. 이 시간들이 소나기를 빠져나가는 신기루처럼 어서 사라지고 빛나는 희망을 품고 싶다. 이렇게 기별도 없이 눈이 찾아오고 동짓달 그믐밤이 오면 군데군데 옹이가 박힌 소나무 장작을 서너 개 아궁이 속으로 집어넣고 송진이 타는 향기를 맡으며 책을 읽던 그 시절로 가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그리고 나의 본향인 그곳으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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