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창조경제팀장

변광섭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창조경제팀장

보라. 동트는 산천을, 트림하는 대지를, 노래하는 새들을, 붉게 빛나는 태양을. 자연은 다투지도 서두르지도, 욕심 부리지도, 방황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이익만을 쫓지도 않고 아쉬움과 미련에 억매이지도 않는다. 오직 자신이 걸어온 길, 걸어가야 할 길을 갈 뿐이다. 자신이 있어온 곳, 있어야 할 곳에 엄연하게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자연은 서로를 보듬고 배려하며 새 순 돋는 아픔을 인내한다.

칼바람 부는 북풍한설에도, 그토록 뜨거웠던 여름날에도, 세상을 요동치게 하는 태풍 속에서도, 메마른 땅 갈증나는 가뭄 속에서도, 어둠이 밀려오는 고립무원에서도 자연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훌훌 털고 일어선다. 새 날의 노래를 부른다.

자연은 조금씩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간다. 온 몸을 부비며 상처를 딛고 새로운 꿈을 빚는다. 그 성장통을 켜켜이 쌓고 담고 품는다. 흐르는 물은 멈추지 않는다. 강이 되고 바다가 되어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 소나무 숲에서 잠시 묵상하자. 철갑을 두른 껍질과 솔잎 사이로 햇살이 눈부시고 솔잎 향 가득하다. 소나무의 강건한 삶이 끼쳐오지 않던가. 그것이 그동안 견뎌온 진한 삶이다. 가르마 같은 들길, 도시의 골목길 풍경 속에서도 삶의 향기가 묻어있다. 정중동(靜中動). 자연은 이처럼 조금씩 자신의 삶에 의미를 담는다.

인간은 어떠한가. 부끄럽지만 매사가 헐겁고 간사하며 불온하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여기에 서 있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진지한 성찰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과 아집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고 핏대를 세운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상대방에게는 냉정한 이중적 잣대를 갖고 있다. 가장 뜨거운 기쁨도, 가장 통절한 아픔도 사람으로부터 나올진데 지금 우리는 서로에게 아픔만 주고 있다.

사람에게는 자연과 달리 실천과 인식이라는 두 개의 다리가 있다. 그 속에는 이기적인 본능과 이타적인 본능이 함께한다. 생존을 위한 전략적 무기일 것이다. 방황과 고뇌와 성찰과 각성의 시간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세계를 인식하고 자신을 깨달으며 새 날을 준비하는 성숙된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늘의 명령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은 늘 미약하다. 가증스럽기도 하고 부끄러움 가득하다. 스스로를 책망하기도 하며 참회의 시간을 갖기도 하지만 그 때 뿐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생각과 말과 행동의 이중적 행태를 서슴지 않는다.

올 한 해를 어떻게 달려왔는지 되돌아보자. 정의롭고 진실한 정치였는지 물으면 모두들 혀를 내두를 것이다. 국가의 품격까지 추락시킨 희대의 사기극을 지켜보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서야 했다. 촛불은 횃불이 되고 용광로가 되었다. 대통령은 탄핵이라는 엄중한 심판대에 서 있다. 이 와중에도 자신들의 욕망만을 쫓는 자들이 허다하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몸 다 바치리라 외치면서도 속내는 정치적 야망에 대한 셈법으로 가득한 것이다.

경제가 침몰하고 있고 문화적 환경도 녹록지 않으며 외교적 여건 또한 석연찮다. 기업하는 사람들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며 가슴을 친다. 청년들의 일자리도 좀처럼 잡힐 기미가 없다. 문화융성을 목청껏 외쳤지만 이벤트만 가득하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진정한 가치의 예술은 요원하다. 중국의 대륙문화와 일본의 해양문화 속에서 한국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생각할수록 가슴이 오그라든다.

남 얘기 하지 말고 우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자. 가정과 직장과 사회를 위해 얼마나 충실하였는가. 나만의 욕망 때문에 이웃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가. 근거 없는 찌라시를 만들고 상대방 발목을 잡는 일은 없었던가. 불확실하고 불온한 세상에 가슴 따뜻한 존재로 남기 위해 무엇을 하였던가.

새 해에는 '더불어 함께' 손잡고 가야 한다. 아픔을 딛고 새로운 꿈의 최전선을 향해 달려가기엔 혼자는 외롭고 나약하다. 그러니 함께 손잡고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한다. 고통이 진주가 되면 좋겠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가장 아름다운 시를 쓰며, 가장 아름다운 날을 위해서 말이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