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창조경제팀장

내 나이 쉰둘. 지천명이니 이런저런 각다분한 일상을 정리하고 순리를 찾을 법도 한데 마음이 수상하다. 하여 정유년 첫날부터 지나 온 내 삶의 흔적을 찾아 어슬렁거린다. 먼지 자욱한 서재속의 책을 꺼내들며 지식의 최전선에서 밤낮없이 글밭 가꾸던 청춘을 되돌아본다. 골목길을 자박자박 걸으며 지난날의 영광과 상처는 무엇인지 되묻는다. 산정높이 올라가 어둠을 뚫고 피어나는 태양 한 점을 가슴에 품어본다. 그리고 또 묻는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떤 존재로 남을 것인가.

나는 오랫동안 광야에서 어둠을 지키고 새 빛을 갈망하며 달려왔다. 홀로 목 놓아 노래를 부르고 밤낮없이 스스로를 닦달하며 새로움에 도전했다. 마른땅에 씨앗을 뿌리고 싹 틔우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북풍한설 마른 가지에 새 순 돋는 성장통을 기꺼이 받아 들였다. 내게 금수저는 사치였다. 언제나 비주류였고 마이너였기 때문에 여기서 주저앉으면 영원히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나를 긴장케 했다. 이 같은 도전은 나를 더욱 강건하게 했다. 내 삶의 족적과 꿈을 하나씩 일구고 그 과정에서 겪는 상처까지 사랑해야 했다. 일 년에 책을 한 권씩 펴냈다.

죽을 때까지 내 키만큼 써야겠다는 다짐에는 변함이 없다. 삶의 흔적이자 자아성찰의 길이며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시대를 정직하게 호흡하고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하고 싶었다. 내가 태어난 고향과 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가슴 뛰는 고민을 하면서 사회적 책무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겁다. 크고 작은 축제와 문화기획 현장에서 벅찬 감동도 맛보지만 부끄러움과 불안감에 가슴 졸인 적이 한두 번 아니었다. 100년의 먹거리를 만들기 위한 노력보다는 일회성, 이벤트성 행사에 몰입돼 있는 현실 때문이고 나의 능력과 역할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의 꽃이 피고 예술의 열매가 맺으며 그 감미로운 성찬을 이웃과 함께 즐기도록 하는 일에 매진해야 할 것인데 갈 길이 요원하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아픔이 되고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럽고 두렵다.

그렇다고 뒷걸음질 칠 수 없다. 밭가는 소는 절대 뒷걸음질 치지 않는다. 항구를 떠난 배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유목민들의 격언에 성을 쌓는 자 망하고, 길을 떠나는 자 흥한다고 했다. 사람과 사회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관용(똘레랑스), 그리고 새로운 세상과 환경에 대한 인식의 확장(노마디즘)이 있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불모의 땅 광야에서 사랑을 경작하기 위해 열정과 지혜와 힘을 모으기 때문이 아닐까.

세밑에 지역의 원로 몇 분을 만났고 새해 아침에는 청년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세밑에 만난 원로는 평생을 교육자로 살아오신 유성종 선생, 생명보리 화가 박영대 화백, 문인 박영수 선생, 철학자 김태창 교수였다. 이분들의 바램은 '사람사는 세상,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도시'였다. 청주정신을 살리기 위한 첫 번째 과제가 지역의 인재를 키우는 일이라고 했다. 사람과 공간과 역사를 제대로 가꾸는 일부터 하라는 말씀에 가슴이 먹먹했다.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창조경제팀장

청년들과의 만남에서도 화두는 문화였다. 음악을 하고 그림과 조각을 하며 건축가로 활동하는 청년들이었는데 꿈과 열정과 아이디어로 중무장했다. 아티스트로 살아가는 길이 험난할 것인데 자신감과 희망에 찬 메시지가 기운찼다. 혼자 잘 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사람사는 세상, 청주만의 멋과 결과 향기로움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이들이 마음껏 희망할 수 있는 지역문화의 토대를 만들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울 뿐이었다.

정유년 첫날, 차디찬 광야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아야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을 위해 고심참담(苦心慘憺)의 시간을 가졌으니 나도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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