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상의 생활 중 마음이 답답할 때면 집을 나선다. 마지막 달력의 숫자가 꼬리를 감출 무렵, 가벼운 마음으로 버스를 탔다. 구만리 장터에서 내려 신작로 길을 가다가 왼편 길로 가니, 야트막한 산이 보인다. 오랜 기억으로 남아 버린 구불한 길을 따라 산을 넘던 그 길은 어느덧 나무숲에 묻히고 가지 못하는 길이 되었다.
 내가 살아온 삶의 여백 위에도 가지 못하는 길이 보인다. 짐 되는 것은 훨훨 벗고 순리(順理)의 길을 찾는 이 길엔 내 발자국 소리만 은밀히 들릴 뿐이다.
 보드랍고 소박한 그 길을 더 가고픈 마음 한아름 안고 나와 옥골 마을 앞에 있는 연못을 바라본다. 여름 한때 물 위에 곱게 핀 연꽃도 다 떨군 그 모습이 을씬년스럽다. 얼마쯤 바라보다가 지난 여름 방문한 노인정으로 발길을 옮기니 그때 일이 문득 머리를 스친다. 40여년 전 옥동초등학교에 근무할 때 이 마을에서 살았다는 말을 꺼내어도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아마도 그 당시 동네 우물가에서 물을 긷는 갓 시집온 새댁의 모습을 본 듯도 한데 젊은 아낙네를 보며 아는 척 하지를 않아서인가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던 발길은 노인정으로 다가섰다.
 문 밖에 있으려니까. 릫누구셔요릮 하고 문을 열자, 알아보고는 반가이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이어서 릫밥 좀 잡수셔요릮 하는 목소리가 내 귓전을 울린다. 그 옛날 논둑 밭둑에서 손나발로 건너편에 있는 김서방, 박서방 하며 불러들이던 정겨운 소리가 아닐런가.
 오랜만에 그 목소리를 듣고서 안으로 들어가니, 10여명 되는 안 노인들이 도란도란 모여 점심을 하고 있었다. 차려주는 점심밥을 보며 사양을 했지만 거듭 권하는 호의에 못 이겨 점심을 함께 할적, 상위에 올라온 장맛과 김치맛이 그만이었다. 점심 후엔 지난 여름에 보던 연꽃이야기며 릫보릿고개릮를 넘기면서 고생하며 살던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내 어릴 적 논에서 일할 때 릫밥 좀 잡수셔요릮란 말을 듣고서 그때의 그리움으로 허기가 졌는데 여길 와서 들으니 정겹기만 하다. / 청주 사랑교회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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