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시론] 표언복 대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정유라 이화여대 재학 당시 정 씨의 대리 시험 등 학사 특혜를 준 의혹으로 구속된 류철균(필명 이인화) 교수가 6일 오후 서울 강남구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사무실로 소환되고 있다. / 뉴시스

이화여대 류철균 교수가 최순실 씨 딸 정유라 씨에게 부당한 방법으로 학점을 주었다 하여 특별검사팀에 의해 지난 달 31일 구속되었다. 2015년 1학기에 열린 자신의 온라인 강좌 '영화 스토리텔링의 이해'라는 과목에서 시험도 치르지 않은 정유라에게 학점을 주고, 문제가 불거지자 조교를 시켜 정유라의 과제를 대신 제출케 했다는 의혹이 있다는 것이다. 나라를 온통 뒤흔들어 놓고 온 국민을 크게 속상하게 한 사건과 관련된 데다, 그동안 쌓아온 소설가로서의 명망이 만만치 않은 터라 국민들에게 미치는 충격과 파장이 적지 않은 듯하다. 정작 정유라는 생각지도 않은 학점이 나와 오히려 의아했다는 반응이었다고 하니 참 어이없는 일이기도 하다.

대학에서 학점 얻고 졸업하는 일이 우리나라만큼 쉬운 경우는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대학생활을 웬만큼 성실히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매 학기 학점을 얻는 일이 그리 녹록지만은 않다. 머리 싸매고 밤새워 공부를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면서, 대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등급을 받아 번번이 실망스럽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학점을 누군가는 시험도 보지 않고 과제도 제출하지 않았는데 받을 수 있었다면 이는 다른 누군가의 자리를 가로채 들어간 부정입학 못지않게 심각한 교육적 병리현상이 아닐 수 없다. 시간 맞춰 강의 듣고 과제 준비하며 두 차례씩 시험까지 치르면서 학점을 얻느라 고생하는 학생들이 받았을 상실감과 허탈감을 생각하면 사뭇 낯 뜨겁고 얼굴 붉어져 고개를 들 수 없는 심정이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류 교수는 할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수강생 2천900명 중 학점을 올려달라고 요구한 학생 100여 명의 요구를 들어줬으며 정씨는 그 중 한 명일뿐"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사실일 것이다. 성적이 나간 뒤 학점을 달라거나 올려달라는 100여 명 학생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가운데 이미 그 위세를 알고 있는 정유라에게도 별 가책 없이 학점을 준 것일 수 있다.

학점은 마땅히 학생 개개인의 노력과 성실성에 비례해 주어지는 것이어야 옳다. 교수의 주관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작용할 수는 있지만 그주관이 원칙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최선을 다하는 노력 없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없고 성실하지 않으면 어디서나 인정받을 수 없음을 일깨워 주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점은 누구라도 신뢰할 수 있을 만큼 엄정하고 투명하게 주어지는 것이라야 한다.

그런데 대학사회에서 이 같은 원칙과 당위가 무너진 지 오래다. 학점이 나간 뒤 교수들은 너 나 없이 학점 정정을 요구하는 학생들로 인해 이루 말할 수 없는 시달림을 받는 게 현실이다. 더러는 교수의 착오나 오류를 지적해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지만, 아예 받지 못한 학점을 달라거나 더 좋은 성적으로 올려달라는 요구는 훨씬 더 많다. 이성적 합리성이나 논리적 타당성은 처음부터 배제된 요구들. 인정, 선의, 배려 따위에 기댄 전화가 빗발치고 메일이 쌓이며 연구실 방문이 빈번해진다. 어느 새 상호 신뢰와 존중 같은 것은 쉽게 허물어지고 교수의 자존심과 학생의 끈기만 남은 지루한 공방이 계속된다. 더구나 신분이 허약한 강사들은 학생들이 칼을 쥐고 있는 강의 평가에 취약하다. 최순실 씨처럼 부모가 직접 대학생 자녀의 학점 관리에 나선 것은 지난 90년대 들어 나타나기 시작한 현상이다. 대학에 찾아와 학사를 시비하는 학부모 얘기가 들리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의 일이다.

어처구니없는 소모전에 시달리는 교수들 사이에선 학점을 아예 마구 내 주는 경우들도 많다. 그 때마다 교수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자괴심이나 모멸감을 견뎌야 한다. 별다른 노력 없이 웬만하면 다 A학점을 받는 학점 인플레 현상은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대학마다 상대평가제 등을 도입해 보았지만 실효는 없다. 교수들이 학생들과의 접촉이 상대적으로 많은 교양 강의를 기피하고, 학부보다는 대학원 강의를 선호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학점의 엄정성이 사라지면서 학업에 대한 학생들의 성실성이 결여되고, 이는 자연스럽게 학력의 저하를 초래하는 교육적 역기능 현상이 악순환되고 있는 게 오늘의 대학 현실이다. 가히 대학 교육의 황폐화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

교육자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지식인으로서 양심도 내어던진 류 교수의 처사는 백 번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학점의 엄정성을 상실한 우리 대학사회의 고질적 병리현상 앞에서 그 역시 적지 않은 고뇌를 겪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계제에 수많은 최순실과 정유라가 판치며, 정실과 위세와 억지에 휘둘리는 우리 대학의 민낯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지금 대학은 아주 위독한 병증에 시달리고 있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