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민정 수필가

자료사진 / 클립아트 코리아

까맣게 잊고 있던 그가 친정 오빠 집에 나타났다. 삼십여 년이란 아득한 시간을 뛰어넘어 이순을 바라보는 그의 옛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낯선 모습이었다. 몇 잔에 소주와 그간 지내 온 이민생활을 안주삼아 실타래를 풀고 있는 그에게 밤은 짧기만 했다. 외사촌 오빠가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간 것은 28세의 젊은 나이였다. 당시 친형이 뉴욕에서 마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형의 초청으로 시작한 이민생활이었지만, 자신이 길을 닦으며 걸어야만 했다. 인종차별과 편견으로 고달픈 생활은 이민자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묶인 채 마음은 자꾸만 한국으로 뒤돌아가라 했다. 그러나 뒤돌아 가봤자 새어머니와 이복동생들과의 내면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이 그를 더욱 불편하게 할 뿐이었다. 어떻게 하든 반드시 성공해서 아버지 앞에 떳떳한 아들로 고향땅을 밟으리라는 각오로 살았다. .

그로부터 몇 년 후 꿈을 향한 열정과 성실함으로 시민권도 취득하고 드디어 자신의 가게를 소유하게 되었을 땐 꿈을 다 이룬 것만 같았다. 형편이 점점 나아지자 한국에 잠시 들어와 맞선을 본 끝에 결혼하여 남매를 두었다. 지칠 줄 모르는 아내의 억척은 그가 제법 큰 가게를 만드는데 큰 힘을 보태었다. 주말이면 골프와 여행도 즐겼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그가 원하던 프로그램이었다. 큰아이가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 부부는 같은 곳에 있었지만 서로의 다른 곳에서 격정의 시간을 보내야했다. 아내와는 모든 것이 어긋났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아내는 이미 다른 사람이었다. 날줄과 씨줄로 서로 엮어가며 빈틈없이 살아온 줄 알았는데 어디서부터 풀린 것인지 돌아보면 회한으로 가득 찼다. 결국 3년 전 이혼을 하게 되었다. 그 후로 집안은 급속하게 몰락했고 남은 재산은 차 한 대와 고작 월세 방 한 칸이었다. 유통센터에서 납품을 다시 시작한 그는 맨 처음 이민생활로 돌아가야만 했다.

김민정 수필가

자신이 가족을 지키지 못한 죗값을 방랑과 무위로 치르려고 작심한 걸까! 그에게서는 자유롭지 않은 자유로 줄타기를 하는 것 같아보였다. 한국에서 맞이한 정월 초하루, 고교 때 맞이한 새어머니가 아직도 어색하기만 했다. 서둘러 집을 나와 희미한 안개가 낮게 깔린 산길을 오른다. 혼잡한 세상으로 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는 산소는 고요하고 적막했다. 선친의 무덤 앞에서니 머리에서부터 가슴으로 전이 되어 오는 쓸쓸함이 더했다. 그는 담뱃불을 붙여 산소에 꽂아 놓고 소주잔에 술을 따랐다. 절을 올렸다. 금의환향이 아닌 모습에 선친이 많이 노 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아버지니까 이해주시리라 믿었다. 절대로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거늘 그것이 다짐만으로 돼는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계실 것이다. 당해본 사람만이 느끼는 통증, 그도 이제야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며 용서할 수 있었다. 그는 한동안 무릎을 꿇은 채 일어서지 못했다. 고향의 향기로 위로 받고 싶었지만 매운바람만이 맨살 속을 파고들었다. 지나온 길은 아득하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은 까마득하기만 했다. 여정의 마지막 날이다, 그를 위해 몇 가지 반찬과 따뜻한 국으로 식사를 대접했다. 다시 새 출발을 할 거냐는 질문에 그는 운명에 맡긴다고 했다. 삼십년 만에 찾은 고향땅에서 그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고 갈까!떠나가는 그의 등에 잔설이 설기로 얹혀있다. 새로운 길은 언제나 길이 끝난 곳에서 시작되듯이 그에게 또 다른 시작은 후회 없는 길이었으면 한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