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한인섭 부국장 겸 정치행정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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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차남이자 유일한 혈통이었던 히데요리(豊臣秀賴)는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의 거듭된 공격에 도주한다. 그러나 곧 포위돼 활로를 찾기 어렵자 어머니 요도도노와 함께 자결했다. 1615년 6월 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측실이 자식을 낳기 전 양아들 삼았던 히데쓰구를 할복까지 시키며 히데요리 후계체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패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처음으로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가문은 몰락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두 아들 사례 처럼 할복은 일본 사무라이 문화의 대명사나 다름없이 통용된다. 일본의 할복 문화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통일 이전 전국시대를 거친 일본이 끊임없이 전개 된 내전 과정에서 탄생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딱히 언제부터 문화가 생겼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무로마치 시대(1336년~1573년)를 기술한 사서 태평기에는 할복 사건이 2천140건이 등장할 정도로 흔했다고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연 에도시대는 평화가 정착됐을 것으로 보기 십상이다. 그러나 새로운 지배세력에 지역 영주와 우두머리급 사무라이들을 복속시키는 방편으로 '할복'은 더 극성을 부렸다.

새로운 정권에 '코드'를 맞추지 못한 사무라이나 영주는 물론 분야별 우두머리급 전문가들은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을 보호해 달라는 조건으로 '할복'을 택했다. 요즘으로 치자면 '블랙리스트' 였다. 심지어 이 무렵엔 '할복대회'까지 생겼다고 한다. 배를 가른 모양이나, 칼을 쓴 방식 등을 따져 1, 2위 순위를 메길 정도였다 한다.

한인섭 부국장 겸 정치행정부장

우리가 흔히 쓰는 친절(親切)이라는 말 역시 '할복 문화'의 산물이다. 할복 현장에는 배를 가르고 나면 칼로 목을 쳐주는 '가이샤꾸닝(介錯人)'이 배치된다. 칼을 든자가 할복 사무라이가 저세상으로 편하게 갈 수 있도록 하는 행위가 '친절'이었던 것이다. 서양인들과 교류가 시작된 1873년(메이지 6년) 할복은 공식적으로 금지됐다. 그러나 2차 대전을 일으킨 일본은 군인들의 용기와 기상, 사기를 위해 시행했고, 전쟁에서 지자 많은 군인들이 할복을 택했다.

서청원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 10일 열린 의원총회에서 인명진 비대위원장을 향해 "목사님 언제 할복하면 좋겠냐"고 독설을 날렸다. "며칠전에 저더러 할복하라 말했잖냐"며 어금니를 꽉 깨문 그는 "인 위원장이 당을 떠나라"며 들이댔다. 인 위원장이 친박 수장 서 의원을 국정 파탄 부역자이자 인적청산 대상자로 꼽아 "일본 같으면 할복한다"는 공격에 대한 반응이었다. 할복은 자결이지만, 형벌의 한 방법이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더라도 참수형을 할 정도가 아니면 명예로운 길을 택하게 했던 것이다. 친박 우두머리들이 이제 그 선택의 순간에 놓여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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