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 김하윤 배재대학교 주시경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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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에 가면 '당나귀 타는 원시마을'이라는 곳이 있다.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당나귀를 타면서 여행의 즐거움을 배가시켜 주기 위한 이색 여행코스이다. 당나귀가 지금과는 다르게 예전에는 생활에 필요한 교통수단이었으며, 선현들의 문집 속이나 '조선왕조실록'에도 자주 등장하는 친숙한 동물 소재였다. 수많은 시간동안 선현들의 삶과 함께 했던 유용한 동물이었는데,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신라시대로 올라가면 동화로도 전해지는 조금은 다른 이야기의 당나귀가 등장한다.

신라 제48대 경문왕은 왕위에 오른 뒤 갑자기 귀가 당나귀의 귀처럼 크고 길게 변한다. 왕은 이 사실을 철저히 비밀로 하였으나, 오직 두건을 만드는 복두장이만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는 평생 비밀을 발설하지 않다가, 죽기 전 도림사(道林寺)의 대밭 속으로 들어가 대나무를 향해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쳤다. 그 뒤부터 바람이 불면 이 소리가 나서 왕은 비밀을 감추기 위해 산수유로 바꿔 심었으나, 소리는 여전했다고 한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전하는 설화로, '경문대왕의 귀', 또는 '여이설화(驢耳說話)'라고도 불리는 이야기이다.

당나귀와 관련한 옛 이야기는 동서양에도 모두 존재한다. 유고슬라비아의 당나귀 귀를 가진 폭군의 이야기, 몽골의 왕 여이한(驢耳汗)도 당나귀 귀를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그리스 신화'에서는 아폴론의 벌을 받고 죗값으로 당나귀 귀처럼 귀가 길어진 프리지어(Phrygia)의 왕 미다스도 등장한다. 이들 이야기의 공통점은 모두 군주의 귀를 당나귀 귀와 연관 지은 상징성에 있다. 관상학적으로 당나귀 귀는 인기를 얻고 사는 아주 좋은 귀라고 알려졌는데, 위 이야기에서는 모두 군주의 부끄러운 치부나 죄에 대한 온당한 대가를 받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특히 집권 후 강압정치와 모든 부정, 부패와 전횡을 일삼은 경문왕의 이야기는 부도덕적인 허위성을 경고하고 있다. 경문왕은 내우외환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백성은 무시한 채 자신의 이익과 부정에만 몰두했다. 귀는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신체의 일부분인데, 백성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은 군주의 부도덕한 모습을 기이한 귀의 형상으로 표출한 것이다. 나아가 경문왕의 귀는 '지배자의 비밀'이었고, 이 비밀이 폭로되어 국민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만약 경문왕이 백성들의 뜻을 잘 귀담아 들으라는 하늘의 뜻이라면서 자신의 기이한 귀의 비밀을 당당하게 드러냈다면, 이야기는 당연히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도 당나귀의 귀는 현재진행형이다. 온 국민이 알고 있는 '진실의 귀'를 오직 당사자만 정상이라며 부인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만천하에 드러난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파란 지붕 '복두장이'들 몇 명만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여전히 진실 은폐에만 몰두하고 있다. 아직도 거짓이 참을 이길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모양새다. 마치 자신에게 들리지 않으면 남도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속여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치는 형국[掩耳盜鈴]이라고나 할까. 자신의 잘못을 못 보는 어리석음이다. 조선시대 많은 지식인들은 '자신을 속이지 말라(毋自欺)'는 좌우명을 평생 곁에 두고 지냈다. 조선 예학의 대가인 사계 김장생도 '무자기(毋自欺)' 세 글자만을 평생 동안 힘써 지켜내려고 노력하였다. 사람다움의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를 선현들의 모습에서 배워야 한다.

김하윤 배재대학교 교수

2017년 붉은 닭의 기운을 받으며 새해는 밝았지만, 나라는 아직도 어수선하다. 새해에도 매일 터지는 당나귀 귀(?) 소식들을 접하면서 이 시대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국민들의 삶은 점점 팍팍해져가는데, 위정자들의 비리는 화수분처럼 연일 끝이 보이지 않는다. '재물(財物)'이 아니라, 재앙의 '재물(災物)'만이 끝없이 쏟아지는 적폐의 화수분인 것이다. 이제 당나귀의 귀 이야기는 고전으로만 만나고, 한시라도 빨리 이 막장드라마가 종방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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