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론 제가 이끌어 줘야죠"

불의의 사고로 경추마비 장애를 겪고 있는 강현 충북장애인럭비협회 선수가 "중도장애인들이 포기하지 않게 앞에서 이끌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며 고된 훈련으로 거멓게 때가 탄 장갑을 들어 보이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 신동빈

[중부매일 이완종 기자] 양손으로 공을 잡은채 코트를 누비는 강현(48)씨 럭비 선수다. 보통 럭비선수라 하면 우람한 체격에 각종 보호장비와 타원형의 공을 들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지만 그는 조금 특별하다. 일반 럭비선수처럼 큰 덩치도 아닐뿐더러 휠체어도 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여느 럭비 선수와 다르지 않다.

강씨는 20여 년전 불의의 사고로 척수장애 판정을 받는다. 퇴근길 조치원으로 향하는 택시를 타고 모임장소로 가는 도중 차량이 왼쪽 가로수와 충돌하며 불의의 사고를 입는다. 수 일이 지난 뒤 의식을 찾은 그는 다리와 손 등에 감각이 없음을 깨닫는다. 당시 그의 나이 24살, 경추 6번과 7번이 손상되며 팔과 다리를 쓸 수 없는 척수장애 판정을 받는다.

"비가 아주 많이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두 다리를 잃은 그날을 잊을 수가 없어요. 퇴근길 친구들과 약속장소로 가기 위해 탄 택시가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는 마지막이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사고 이후 의식을 잃고 눈을 떠보니 병실이더라구요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열악한 의학기술로 전국의 병원을 떠돌며 치료를 진행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더욱이 2년간 병상생활을 하며 재활치료도 병행했지만 그의 두 다리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을 들끓을 젊은 나이에 겪게된 중도장애는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병원에서의 일상은 재활의 목적보다 목숨의 연명정도로 생각됐습니다. 중도장애인들 대부분이 겪는 느낌이겠지만 갑자기 찾아온 '장애'를 인정하지 않고 방황했죠."

이후 2년여 간의 재활치료가 끝나고 나온 병원밖은 현실이었다. 이미 그에게는 '장애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어버린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은 차가웠고 그가 '장애'를 인정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매일매일이 술과 함께 하루를 보냈어요. 외출을 기피했고 친구들과의 만남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었습니다. '내가 장애인이 됐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3년여 의 은둔생활 끝에 남은 것은 몸과 마음의 병이었다. 몸은 더욱 허약해졌고 마음은 더욱 굳게 닫혔다. 평소 운동을 좋아했었기에 취미로나마 시작하려던 운동도 번번히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시작조차 못했다. 그렇게 방황하던 중 우연히 접하게 된 '휠체어럭비'는 그가 인생 제2막을 시작할 수 있게 만들어준 열쇠 였다.

"휠체어 럭비는 암울했던 인생에 한줄기 빛 같았습니다. 처음 럭비를 해보라는 지인의 추천에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콧방귀를 뀌었지만 알고있던 럭비와는 다르다는 것을 머지않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휠체어럭비는 비록 두 다리는 움직이지 않지만 충분히 코트를 누빌 수 있었고 장애인인 저도 '운동선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의 꿈은 장애인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장애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변하는 것이다. 때문에 휠체어 럭비 도대표팀을 이끌며 장애인들의 체육활동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지금도 사회 곳곳에는 단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핍박받고 눈치를 살피는 장애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체력이 허락 하는데 까지 운동을 꾸준하게 하고싶어요. 그렇게 자리를 지키며 장애인들의 손을 잡아 사회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습니다. 장애인들은 그저 따듯한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한편 휠체어럭비는 농구코트와 유사한 가로 28m, 세로 15m의 실내경기장에서 한 팀에 4명씩 4대4로 진행되는 경기다. 배구공처럼 생긴 둘레 65~67㎝의 공을 가진 선수가 패스나 드리블을 통해 전진한 뒤 상대 진영 골라인을 통과하면 1점을 얻는다. 1977년 캐나다에서 사지마비 장애인을 위해 고안한 스포츠로 2000년 시드니장애인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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