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민정 수필가

길을 나섰다. 차창 안으로는 따사롭던 햇살이 길 위에서는 모난 바람에 조각조각 각을 세웠다. 겨울하늘이 낮게 내려앉은 둔치에는 개망초, 뚝새풀이 낙엽을 이불삼아 삭풍을 이겨내고 있었다. 뒤에서 따라오는 바람과 함께 걷다보니 어디선가 소란스런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바람에 밀려오고 밀려가는 억새풀과 갈대무리의 서걱대는 소리였다. 추동길은 계절마다 다른 모습으로 억압된 마음을 무장해제 시켜준다. 어둠이 궁싯거리며 마른 갈대의 발치를 더듬기 시작했다. 서둘러 호숫가를 빠져나왔다. 어둠은 나를 길에 가둔 채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마음을 돌려놓았다. 수많은 길 위에 서성이는 나를 본다.

*생의 길 / 예행연습 없이 걸어 온 길이다, 제 인생의 항로를 찾아 떠나온 지 어언 쉰하고도 일곱, 오르막과 내리막이 쉼 없이 흔들어 댔던 지나온 길을 뒤 돌아 보니 "저 길을 어떻게 걸어 왔던가?" 비틀거리면서도 부끄럼 없이 살아온 길, 이제는 가야 할 길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음을 안다. 천개의 눈과 천개의 손을 가진 관세음보살이 일으킨다는 석모도 바람 길을 걸어본 적이 있다. 차가운 바람이 마음을 때리면 오히려 더 뜨겁게 다가오는 오기는 굴곡진 세월을 넘게 했다. 첫 고비를 숨차게 넘으니 두 번째 세 번째 고비는 보다 쉬웠다. 지금은 가파른 바윗길에서도 힘이 넘친다.

*엄마의 길 / 내 생애에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길이다. 잘 먹지도, 잘 자지 못해도 엄마는 행복하다. 똥 기저귀를 처음으로 갈아줄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2만 번의 밥상을 차리면서도 행복하다. 훌륭한 어머니는 그 모습에 아이의 모습이 투영되고 어머니의 역할이 자식의 미래를 결정짓는다. 타국에 있는 딸에게 끊임없는 편지로 정신적 지주역할을 한 조수미 어머니, 사그라지는 기억으로도 무대에 서는 딸을 응원하는 모습이 생생하다. 비금도 오지에서 소금을 생산하여 아들의 뒷바라지한 이세돌 어머니, 미리 정승이 될 것을 알리고자 자식에서 자네라고 호칭한 정운찬 서울대 전 총장 어머니, 이들을 보며 나는 자식을 위해 엄마의 역할을 잘하고 있는지 자문해 본다. 자식사랑은 어미의 삶의 원천이며 원동력이자 목표이기도 하다. 자식을 행복하게 해 주다보니 나 자신도 행복했다.

*문학의 길 / 때로는 등짐을 지고 몇 천 미터 정상을 향해 오르는 세르파의 고충도,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순례자의 길일 때도 있다. 거친 돌무더기에서 아름다운 돌 하나를 찾아내는 것 같은 정성과 인내도 필요하다. 그래도 이 길을 가야만 하는 이유는 그 길 끝에는 꿈과 희열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글은 한숨과 눈물을 비우는 해우소이기도 하다. 시원함과 치유가 있어 나날이 건강하다. 새해가 밝았다. 기어이 가야만 하는 길 위에 서있다.

김민정 수필가

열두 달의 허락된 시간이 때로는 망망대해에서 쪽배를 타고 건너야 될지도 모른다. 일망무제(一望無際) 펼쳐진 산등성을 타고 넘어야만 하는 곤고함이 따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석양에 지는 일몰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냈다는 안도감과 내일 또 해가 뜨리라는 희망으로 살아간다면 감사함과 행복도 찾아올 것 같다. 여러 갈래의 길은 언제나 비밀스럽고 판도라의 상자와 같다. 그러기에 길은 가야 하는 것 보다는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열심히 하다 보면 마지막 날에는 산티아고 순례 길을 무사히 도착 했을 때와 같은 감동이 찾아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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