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종완 농협안성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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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 새해가 시작되면서 나이를 한 살 또 보탰다. 이제는 살아온 날 보다 살아갈 날이 짧다는 사실에 나이 먹는 것이 두렵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새해를 유난떨며 맞이하는 이들을 이해하지 못한 적이 있다. 매년 오는 새해지만 새로운 날들은 지나간 시간들과 전혀 다른 시간으로 온다는 점을 간과하고, 누구에게나 첫날이고 첫 경험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탓이다. 역사 속 정유년은 정유재란(1597)때 위대한 승리를 거둔 이순신의 명량대첩이 있고,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1897) 등이 있다. 이번 정유년은 후대 사람들에게 어떤 역사로 기록될지, 나의 정유년은 훗날 내가 어떻게 떠올릴지 기대되고 궁금해지는 한 해의 시작이다.

생명과 시간의 공존은 필연이고 거역할 수 없는 순리다. 시간은 밤도둑처럼 조용히 내 일상에 스며들어오는 생물이고, 시간이 생물임은 시간의 영속성으로 검증된다. 시인 최하림은 "그림자도 없이 시간들이 소리를 내며 물과 같은 하늘로 저렇듯 눈부시게 흘러간다"고 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다가오는 시간의 일방성은 잔인하기까지 하다.

작가 김훈은 "인간과 시간의 관계는 인간이 끝끝내 시간을 짝 사랑하는 일방적 관계다. 시간은 인간 쪽으로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인간은 시간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고 말한다. 시간으로부터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 지금 흘려보내고 있는 시간을 맹렬하고도 유연한 자세로 움켜쥐고 싶은 정유년이다.

지난 주말 아내와 내장산에 터를 잡은 고찰 백양사에 다녀왔다. 결혼 27년에 접어든 우리 부부는 지금껏 기념일을 챙기며 사는데 무심했다. 그러다 올 결혼기념일에는 좋은 추억 하나 만들고 싶은 마음에 이끌려 백양사로의 시간 여행을 택했다. 단풍이 절정일 때 인산인해를 이룬 방문객의 북적거림은 온데간데없고 산사는 고즈넉하고 적막하다. 한겨울에도 여전히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홍시에 넉넉한 인심이 묻어있고, 텃새인 직박구리가 홍시를 쪼아 먹는데 내 마음이 포만감의 기별을 전한다. 산사 초입 700년 풍파를 견딘 갈참나무와 500년 세월을 버틴 비자나무가 위풍당당하다.

이종완 농협안성교육원 교수

정유년을 열 번 이상 맞이했을 갈참나무와 비자나무 밑에서 시간의 무게감에 숙연해진다. 긴 세월 산사를 찾은 방문객을 지켜본 갈참나무와 비자나무를 보며 옛 선인들의 삶을 가늠해본다. 정유년 나의 시간을 나의 손으로 차이를 만들어내고 싶은 마음이 움튼다. 시인 서정춘은 "정원사가 전지를 잘못하면 거목이 죽는다. 그걸 알면서도 정원사는 계속 잘라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열매와 꽃이 많이 필 수 있는 그런 부분을 살리면서, 그런 걸 다 생각해 가면서 시를 자르려다 보니 참 환장하지, 내가. 우리 마누라가 당신 몹쓸 병에 걸렸다고 한다"고 말했다. 일상의 무의미한 시간이 인생의 꽃을 피우고 튼실한 열매를 맺는 유익한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일상을 전지하고 싶은 시간이다.

시간의 냉혹성은 어제와 똑같은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정유년에 다가오는 매 시간과의 여행이 내 인생이 된다. 하루하루는 내 일생과 맞먹는 시간이다. 하루하루 허투루 살다 보면 인생 농사가 그르쳐진다는 것은 시간이 주는 형벌이다. 세상사람 다 속여도 자신만은 속일 수 없다는 삶의 엄격성은 매 시간 행동에 올바름을 요구한다. 인생은 시간마다 치열하게 살아내는 사람에게 시간의 합이 주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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