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칼럼]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정치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과 덕목은 무엇일까. 투철한 국가관과 리더십, 아니면 올바른 판단력이나 투명하고 청렴한 자세를 꼽는 사람도 있을 테고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남다른 소통능력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모 신문은 빅데이터를 동원해 대통령의 자질로 개혁·도덕성·소통을 들었다. 이런 자질을 고루 갖춘 대통령감이 있을까. 아마 국민들의 로망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비현실적인 바람이기 때문이다.

현실속의 정치인들이 반드시 갖춰야할 자질은 후안무취(厚顔無恥)라는 말을 들을 만큼 뻔뻔스러움이 아닐까 한다. 거기에다 더 보태면 혀를 내두를 만큼 위선적이거나 아전인수(我田引水)식의 자기합리화라고나 할까. 이런 정치인들의 자질에는 여야도 없고 보수와 진보도 없고 좌파와 우파도 없다. 이념을 떠나 기본적인 스펙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무리 눈이 부실만큼 화려한 학력과 경력을 갖췄어도 얼굴에 철갑을 두른 듯 뻔뻔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예 정치할 생각을 말아야 한다.

과한 지적도 아니고 피상적인 얘기도 아니다. 반기문 전유엔사무총장은 "일부 정치인의 구태의연하고 편협한 이기주의적 태도도 지극히 실망스러웠고 결국 이들과 함께 길을 가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판단에 이르게 됐다"고 말했다. 그의 불출마의 변(辯)에는 분노가 엿보인다. 하지만 그가 지인에게 "(난)너무 순수했다. 정치인들은 단 한사람도 마음을 비우고 솔직히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더라. 정치가 정말 이런 건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며 한탄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정치와 정치인의 속성을 모르고 애국심만 갖고 '대선판'이라는 정글속에 뛰어든 것은 칼과 방패도 없이 의욕만 갖고 검투사의 길로 나선 것과 같다. 47년간 전 세계 외교가를 누비며 수많은 국가지도자를 만나 국제적인 현안에 대해 '밀당'을 벌였던 관록 있는 노(老)외교관의 말치고는 실망스럽다. 영국 외교관 헨리 워튼은 외교관을 "조국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하도록 외국에 파견되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때로는 이중플레이도 해야되고 교언영색(巧言令色)도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런 외교의 세계에서 반백년을 버티며 유엔의 수장까지 올라갔던 반 전총장은 외교보다 더 힘든 것이 정치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국민들이라고 모를 리 없다. 이전투구(泥田鬪狗)가 판치는 정치,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정치인들에게 식상함을 넘어 신물을 내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1995년 이건희 삼성 회장이 베이징에서 '기업은 2류, 정부는 3류, 정치는 4류'라는 발언을 한 후 엄청난 설화(舌禍)를 겪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그의 말에 공감했다. 그래서 비정치인들이 느닷없이 참신함과 청렴한 이미지를 무기로 정계에 입문해 한때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문국현 전유한킴벌리 사장, 정몽준 전대한축구협회 회장, 고건 전 국무총리 그리고 안랩 창업자인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등은 한때 가파르게 치솟은 지지율에 현혹돼 대권 도전에 나섰다가 좌절했다. 마치 '메시아'처럼 새로운 정치를 구현할 인물로 떠올랐지만 추락하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이미지 정치'는 오래가지 못한다. '뿌리 없는 신드롬'은 신기루 같다. 막상 대선에 출마하면 모든 게 발가벗겨져 후보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비전과 정책이 안보이고 정체성과 리더십 부재 등이 거론되면서 '거품'이 순식간에 빠진다. 정치에 입문해 진흙탕속에서 뜨거운 맛을 봤던 안철수 전대표가 점쟁이처럼 설 연휴 이후 반 전총장의 중도하차를 족집게처럼 맛 춘 것은 자신의 경험 때문이다. 그나마 안철수는 젊기 때문에 가시밭길을 걸으며 다시 도전할 용기라도 낼 수 있었지만 반 전총장은 인생의 황혼이다. 도전하고 싶은 기력도, 의욕도 상실했을 것이다.

역시 베네치아 외교관 출신인 미키아밸리는 '군주론'에서 권력의 위선과 욕망, 인간성의 어두움과 이중성을 파헤쳤다. 군주는 때로 여우, 늑대처럼 행동하며 불리할 때는 약속을 어기고 자신이 가혹하다는 평판에 전혀 개의치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군주를 정치인으로 바꾸면 우리의 대선주자들의 민낯이 일목요연하게 보인다. 다만 미키아밸리는 개인이 아닌 국가의 이익이라는 대의를 전제로 했다. 반기문은 '인격살해 같은 음해'를 견딜 수 없어 대선행 열차에서 내려왔지만 지도자라면 달라야 한다. 21세기 무한경쟁 시대에 지도자가 글로벌 경쟁에서 이기고 변화를 주도하고 위기를 극복하려면 마키아벨리 말처럼 단편적 선악과 도덕률에 얽매여 현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명망있는 정치신인이 실수라도 대권에 도전하는 일은 더 이상 보기 어려울 것이다. 현실정치에 닳고 닳은 대선주자중 누군가 대권을 잡은 이후엔 나라의 품격이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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