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소산성·나성·정림사지 등 곳곳 역사 발자취

국립부여박물관

[중부매일 김덕환 기자] 봄날을 기다리며 사비길을 걷다 봄날처럼 따사로웠던 지난 일요일, 고즈넉한 백제고도 부여를 찾았다. 사비 백제의 마지막을 간직한 부여는 백제인의 꿈을 실현한 도시였다.

백제인은 새로운 도약과 번영을 꿈꾸며 철저한 계획 아래 도시를 만들고, 538년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천도했다.

계획도시다운 면모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비 백제 왕릉의 후원이자 외부의 침입으로 왕궁을 수호했던 부소산성, 그곳을 기준으로 북쪽과 동쪽의 자연지형을 따라 도성의 위상을 높였던 나성, 사비백제의 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한 대표적인 절터 정림사지, 백제 왕과 왕족들의 분묘로 추정되는 7기의 무덤이 있는 능산리고분군.사비백제의 시작과 번영, 마지막을 따라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다. 바로 사비길이다.

머지않은 봄날을 기다리며 부여 곳곳에 자리 잡은 사비백제의 발자취를 따라 오래토록 걸어봤다.

시작은 부여시외버스터미널이다. 버스에서 내려 낯선 풍경이 가득한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미리 준비한 지도를 보며 부소산성을 찾았다.

부여 시내 전체를 안고 있는 부소산성을 뒤쪽으로 두고 사비길의 첫 목적지 신동엽문학관으로 행해 걷기 시작했다.

주말인데도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조금 걷다보니 도로명표지판에 신동엽길이 보였다.

강력한 민중의 저항의식을 시로 형상화했던 민족시인 신동엽, 그의 생가와 유품들이 보관되어 있는 신동엽 문학관이 들어왔다.

신동엽 문학관

소박한 옛 한옥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생가 마루에 앉았다. 따스한 햇볕이 온몸을 감싼다. 잠이 들까 자리에서 일어나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신동엽문학관으로 들어갔다. 문학마당, 안마당, 옥상마당으로 이루어진 전시관과 부여출신 화가 임옥상의 작품인 시인의 대표시 구절이 새겨진 깃발이 나부끼는 야외마당이 자리하고 있다. 야외마당을 지나 옥상마당으로 올라가면 부여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전시관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계단이 있어 외부와 내부, 위쪽과 아래쪽이 연결되는 공간의 미학을 느낄 수 있다. 현재 전시관에는 '신동엽의 제주기행'이라는 기획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시인의 생각이 담겨 있는 기록노트를 보며 시인의 제주여행을 살펴보는건 어떨까.

신동엽문학관을 나와 궁남지로 향했다. 삼국사기 무왕 35년(634)조에 '3월에 궁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 리나 먼 곳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못 언덕에는 수양버들을 심고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方杖仙山)1)을 모방하였다'라는 기록을 바탕으로 복원된 궁남지는 여름이면 천만송이 연꽃이 그 일대를 가득 채운다. 아직 오지 않은 여름을 기다리게 하는 은은한 연꽃 향이 코끝을 건드리는 듯하다.

궁남지

겨울 끝자락이라 아무것도 없지 않을까하는 우려는 들어서자마자 사라졌다. 봄빛 머금은 수양버들과 갈색빛으로 변한 연잎대가 어우러져 색다른 정취를 풍겼다. 궁남지 산책길을 따라 걷다보니 잠시 나와 마주하는 시간을 갖게 됐다. 프랑스 사회학자 다비드 드 브르통은 '걷기예찬'에서 "걷는다는 것은 대개 자신을 한곳에 집중하기 위하여 에돌아가는 것을 뜻한다"고 적었다. 그리고 주변을 봤다. 편한 옷차림으로 마실 나온 사람들이 궁남지의 평화로운 풍경을 두눈에 가득 넣으며 걷고 있다. 집 근처 사색하기 좋은 곳이 있는 그들이 몹시도 부러웠다.

궁남지에서 사비길은 두 개의 선택지가 생긴다. 세계유산 등재지구인 능산리고분군, 나성과 국립부여박물관으로 가는 길로 나뉜다. 능산리고분군과 나성으로 가는 길은 걷기보다는 차를 타고 가는 것을 추천한다. 거리가 꽤 멀고, 걷는 길에 볼거리가 많지 않다. 시내 주변을 깊이 있게 보기 위해 국립부여박물관으로 향했다. 백제 문화사를 바꾼 금동대향로가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1993년 능산리고분군과 나성 사이의 백제 때 집터 발굴 중 천년의 세월을 견딘, 거의 녹슬지 않고 원형 모습을 간직한 향로가 발견됐다. 65cm나 되는 향로는 피어나는 연꽃 위에 봉래산이 솟아있고, 봉황이 우아하게 앉아 있는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토록 정교하고 섬세하며 상징적인 향로가 있다니, 위대한 유산은 시간을 초월하는 감동을 전해준다. 박물관에는 이색적인 테마로 역사를 관찰할 수 있는 기획전시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오감만족 어린이 박물관, 지역의 문화창고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사비마루 공연장이 있다. 넓게 펼쳐진 야외공원과 박물관 둘레에 나 있는 산책로가 인위적인 건축물을 감싸며 잠시 휴식을 준다.

정림사지

잠시 한숨을 돌리고 정림사지로 걸음을 옮겼다. 사비백제의 정신적 지주이자 문화부흥의 주축 정림사지, 사비백제의 흥망성쇠를 오롯이 품고 있으며, 특히 일본 고대 사찰의 효시를 이룬 곳이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백제석탑 중 단 2기만 남아있는 정림사지오층석탑을 볼 수 있다. 직접 눈으로 석탑을 확인하는 순간 '아'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단아한 정제미와 우아한 조형미, 고도의 균형미를 보여주는 석탑은 현재의 시간에 있지만, 초월한 세계에 존재하는 듯 신비로운 감동이 느껴진다.

정림사지는 절터다. 백제시대 1탑식 가람배치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강당과 금당, 중문이 일직선상에 놓여있고, 강당과 중문을 연결한 회랑, 금당과 중문 사이 1기의 탑이 배치되어 있다. 사비도성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당시 매우 중요한 사찰이었던 정림사지는 중국을 통해 들어온 불교문화가 백제불교 문화로 완성되는 중요한 증거로 존재한다.

부소산 낙화정

마지막 종착지인 부소산성으로 들어섰다. 부소산성은 백제인들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나고 애잔함을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떨어져 주검으로 절개를 바꾼 낙화암과 백제 영욕의 세월을 함께 한 천년 고찰 고란사가 있고, 마시면 3년씩 젊어진다는 고란사 약수와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며 국정을 논했던 영일루, 백마강에 잠기는 달과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며 하루를 되돌아보던 사자루, 백제 삼충신의 숭고한 넋을 기리는 사당 삼충사 등 많은 유적이 있다.

부소산은 사계절 부여인들의 사랑을 받아서인지 산 곳곳을 탐방할 수 있는 다양한 등산로가 있다. 등산로 곳곳에는 백제의 역사가 담겨있는 유적이 즐비하고, 잠시 걷다 눈을 돌리면 다채로운 풍광을 보여준다.

사비길을 걸어 부여시외버스터미널로 돌아왔다. 백제역사도시, 세계유산도시, 관광도시 등 수많은 수식어가 붙어있는 부여는 면면이 다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부여를 제대로 알려면 한 번의 걷기여행으로는 부족하다. 멀지 않은 시간, 진짜 봄이 오면 다시 와봐야겠다. 싱그럽게 피어나는 부소산성, 봄기운을 가득 머금은 궁남지, 백제 역사 문화의 깊이 있는 유적을 다시 살펴보고 싶다. 이번 주말, 가족과 함께 백제로의 여행를 가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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