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종완 농협 안성교육원 교수

이 사진은 해당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자료사진 (클립아트코리아)

얼마 전 팔순이 넘으신 장인어른과 첫 목욕을 다녀왔다. 샤워 시설이 변변찮은 주택에서 거동이 불편하신 장인어른을 씻겨드리는 장모님의 힘듦을 아내는 늘 걱정했다. 아내가 장인어른과 목욕을 다녀오면 어떻겠냐고 몇 차례 물어왔지만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껏 한 번도 보여드린 적 없는 부실한 내 전라(全裸)를 드러내야 하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한몫했다. 주택의 추운 목욕탕에서 고군분투하실 어른들을 떠올리자 용기가 났다.

장인어른과 나의 전라(全裸) 신고식은 첫 경험이라는 어색함도 무색하게 일사천리로 마무리됐다. 장인어른이 옷을 벗는 것도 거들어드리고 샤워와 머리를 감겨드린 후 온탕에 들어가 나란히 앉았다. 장인어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개운해서 좋다'는 표정과 '함께 와줘 고맙다'는 마음이 물 온도만큼 따스하게 전해졌다. 장인어른이 불편해 하실까봐 몸을 씻겨드리는 것은 목욕관리사의 도움을 받았다. 오십 중반을 살면서 나는 내 면도만 했지 타인의 면도를 해준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다. 장인어른의 입과 턱 주변에 비누를 칠한 후 수염의 결을 찾아가며 조심조심 면도를 해드렸다.

김미경 강사는 "자기 효용감을 느끼는 즉시 사람들은 살아 있는 것처럼 살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다 남에게 인정받을 때,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살아 있다는 느낌은 또 다른 삶을 위해서 사람을 뛰게 만든다."고 말한다. 아내는 '상대방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해주는 것', '상대방이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 진정한 배려라며 장인어른과 목욕 다녀온 것에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좋은 경험이 습관이 되면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변곡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장인어른과의 목욕 경험과 추억은 내 인생의 변곡점이고 축복이다. 그동안 장인어른이 내게 베풀어주신 한없는 지지와 사랑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최근 안락함을 뜻하는 휘게(hygge) 열풍이 일상에 파고든다. 휘게는 '포옹하다', '받아들이다'라는 뜻의 노르웨이말 후게(hugge)가 덴마크로 넘어가 휘게가 되었다고 한다. 토마스 리만 주한 덴마크 대사는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만족하는 마음, 물질에 얽매이지 않고 단순하게 사는 기쁨, 이런 것들이 다 휘게에 포함된다."고 말했다. 장인어른과 목욕했던 시간은 묵은 때를 씻어내는 것보다 내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던 나눔, 배려, 사랑의 인색함을 씻어내는 값진 시간이었고,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휘겔리(hyggeligt)한 경험이었다. 장인어른의 머리를 말려드리며 만졌던 삶의 훈장 같은 백발은 먼 훗날 내 모습이다. 요즘 장인어른과 목욕하는 날을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이종완 농협 안성교육원 교수

장인어른의 여윈 몸은 시간이 할퀴고 간 긴 세월을 버텨내고 이겨내신 흔적으로 다가왔다. 작가 김훈은 오래 병석에 누워 계셨던 아버지의 아래를 가끔씩 살펴드렸고, 아래를 살필 때 아버지도 울었고 자신도 울었다며 아버지를 회상한다. 나는 생전에 아버지의 아래를 살펴드리지 못했고, 야윈 몸조차도 씻겨드리지 못했다. 죽음으로 맞이한 싸늘한 몸을 만지고 쓸어내리며 울었을 뿐이다. 작년 유월에 영면하신 아버지께 전라(全裸) 신고식조차도 엄두를 못내 죄송스럽고 그 두께만큼 그립다. 서툰 부모가 정말 부모다운 부모가 될 때까지 기다려주는 자식과 서툰 자식이 자식다운 자식이 되도록 기다려주는 부모가 되기를 꿈꾼다. "아들이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야 하는 모양이다."는 김훈의 말이 뼛속을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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