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종완 농협안성교육원교수

이 사진은 해당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자료사진 (클립아트코리아)

우리 집 베란다에는 여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화초들로 가득하다. 야영화는 꽃이 보라색으로 피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흰색으로 변하는데 꽃이 피면 달콤한 향이 진동한다. 유치환의 시 '치자 꽃'을 연상시키는 치자나무는 가지 끝에 한 송이씩 흰색의 꽃을 피우는데 향이 일품이다. 수선화과에 속하는 문주란은 백색 화관의 기품이 예사롭지 않다. 빛 들면 피고 빛 지면 오므라드는 사랑초는 신비감만큼 '당신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는 꽃말의 매력에 자꾸 이끌린다. 가뭄에 콩 나듯 존재감을 보여주는 행운목의 꽃대를 확인하는 시간은 설렘이다. 앙증맞은 모양과 색깔로 눈길을 사로잡는 다육식물들도 위풍당당하다.

우리 집에서 화초 키우는 일은 내 몫이다. 분갈이와 거름주기는 외면하고 때맞춰 물만 주고 꽃 감상에만 눈독 들이는 얌체 농장주다. 자라난 가지가 아까워 전지작업에도 전전긍긍해 매번 수형 잡기도 실패한다. 나의 화초 농법이 못마땅했던지 아내가 겨울 끝자락에 화분갈이를 단행했다. 분갈이 하던 아내가 화분 밑 부분을 가득 채우고 있던 스티로폼에 경악한다. 스티로폼이 화분 물 빠짐을 좋게 한다는 명분으로 미화되기에는 그 양이 너무 많았다. 부엽토도 아끼고 이동도 용이하게 하고 싶은 꽃가게 주인의 얄팍한 상술의 폐해다. 아내는 스티로폼 공간을 부엽토로 메웠고 숨구멍을 틔워준다며 뿌리에 붙은 흙을 털어주는 작업도 병행했다. 그동안 아까운 마음에 자르지 못해 헝클어져있던 가지들도 아내의 거침없는 전지작업과 함께 솎아내졌다.

눈(眼)은 세상과 현상을 읽어내는 필터다. 나는 본질을 놓쳤고 아내는 본질에 접근했다. 나는 물주기에 멈췄고 아내는 화초의 성장이 더딘 현상을 눈여겨봤다. 세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움직이는 것이 세상과 자연의 이치다. 화분갈이와 전지작업이 끝나고 며칠간은 화초가 몸살을 앓는지 잎이 말라갔다. 얼마 지나자 땅심을 받았는지 잎사귀에 윤기가 흐르고 새순이 막 움튼다. 화초들로부터 '살다보니 이런 좋은 날이 오네.'라는 느낌을 받게 된 것은 아내의 '본질보기' 덕분이다. 정곡을 들여다보는 삶의 태도가 삶을 제대로 살게 하는 힘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해주는 심안(心眼)은 사물을 주의 깊게 살피는 관찰에서 온다.

서울대 배철현 교수는 본다는 행위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 의미는 '그저 보는 것'이다. '그저 보는 것'은 자신의 과거 습관과 편견대로,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를 보는 행위다. 두 번째 의미는 '살펴보는 것'이다. 살펴보는 행위에는 보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 행위에는 주체도 있고 객체도 있다. 나의 보려는 행위가 의도적이며 그 대상이 확실할 때 우리는 '살펴보다'라고 한다. 세 번째 의미는 '관찰(觀察)'이다. 관찰은 깊이 보는 행위이며, 이것의 특징은 무아성(無我性)이다. 특히 살아 움직이는 어떤 것을 응시할 때 의도를 갖고 볼 뿐만 아니라 그 움직이는 모습을 온전히 따라가기 위해 집중하고 몰입한다. 관찰이란 가시적으로 보는 것을 넘어 '안 보이는 것을 보는' 행위다."

이종완 농협안성교육원교수

봄이 약동하면 찰나에 과격하면서도 거칠게 싹이 트고 꽃망울이 터진다. 순간순간 식물들은 자신의 색깔과 자기 몸의 구조를 다채롭게 변화시킨다. 본질을 보지 못하고 놓치며 사는 세상과 인생에 본질을 잃지 않고 제 모습을 바꾸는 자연의 봄 풍경이 경이롭다. 베란다 화초가 싹을 틔우는 모습을 보며 인생이 되는 순간순간의 일상을 관찰(觀察)하며 살고 싶은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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