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수필] 이난영 수필가

봄은 빛으로 오고 가을은 소리로 온다더니 화원마다 형형색색 아름다운 봄꽃들 미소로 눈이 부시다. 산과 들에도 때맞춰 내린 단비에 겨우내 목마른 대지가 촉촉이 젖어 든다. 늦잠 자는 아기를 깨우듯 해님과 봄바람이 사랑을 속삭이며, 겨우내 움츠렸던 생명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는다.

봄비를 살포시 머금은 겨울나무들이 기지개를 켜며 웃음 짓고 있다. 앙상했던 나뭇가지마다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니 새들도 봄맞이하느라 분주하다. 짝을 지어 노래하며 노니는 모습이 예뻐 넋 놓고 바라본다. 새로운 삶을 꿈꾸게 하는 봄의 숨결에 행복이 꽃처럼 피어오른다.

만물이 기지개를 켜니 온몸이 고무되는 것 같다. 시골 사는 언니에게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다며 안부 전화를 하니, 오히려 고맙다며 '사랑해!' 하는 것이 아닌가. 찾아뵙지도 않으며 안부 전화만 하기가 민망해 전화도 못 하겠다고 하니, 그 마음 잘 안다며 또 '사랑해!' 하신다.

요즘은 사랑한다는 말이 참 많이 쓰인다. 연인들, 부부간, 동기간에는 물론이고 이웃사촌, 지구촌 모든 사람 즉, 관계를 갖는 누구에게나 널리 쓰이는 것을 보면 사회가 그만큼 풍요해지고 여유를 갖게 된 때문이지 싶다.

이성 간의 사랑, 가족 동기간의 사랑, 직장동료나 이웃사촌 간의 사랑, 지구촌 모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 카렌 선드는 '사랑하는 것은 천국을 살짝 엿보는 것'이라는 명언을, 프랑스 극작가 장 아누이는 '사랑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위한 선물'이라며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단편소설에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물었다. 물론 사랑이라고 했고, 어느 시인은 '사랑은 인생행로의 태양'이라고 했듯이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은 부모님의 사랑이며, 사랑의 시발점은 가족이라고 본다. 우리 형제자매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서인지 남달리 우애가 깊다. 각자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살지만, 마음은 하나이다.

봄을 시작하는 3월 첫날, 형부와 언니의 결혼 60주년인 금강혼식이 있었다. 기념으로 온 가족이 정동진, 추암해수욕장, 대금굴 등 동해안 일대로 가족여행을 갔다.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엄마 아빠의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 60년사라는 영상이 나온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면서 형부의 군대 시절부터 결혼사진, 환갑잔치, 조카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졸업, 입학은 물론 소풍, 운동회, 학예발표회 등 즐겁고 행복한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언니보다 열다섯 살이나 어린 나는 무엇했나 싶다. 맞벌이한다고 아이들 학교에 제대로 가본 적이 없으니, 같이 찍은 사진도 거의 없다. 직장생활은 열심히 했지만, 부모로서는 많이 부족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2부에는 손자 손녀 재롱 사진과 첫째 손녀 결혼사진, 그리고 형제자매들의 다정했던 모습과 2년 전 형부가 암 수술하기 전 동해안으로 가족여행 갔던 아름다운 추억들이 담겨있다. 옛 추억이 그리워 꿈속에서 향수를 달래었는데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영상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평소 삶을 즐기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좋아 보였는데, 그동안 살아오면서 "참 행복했다"고 하시니, 얼마나 복된 삶인가. 부부든 친구든 동기간이든 어느 시점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우리는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 믿음과 사랑으로 점철되었기 때문 아닌가.

수준 높은 영상도 놀라운데 차 안에서 먹을 다양한 음식, 사전예약해야만 입장 가능한 대금굴 관광, 가족사진용 플래카드까지 준비한 조카들의 섬세함과 품격 있는 여행계획에 놀랍고 감사했다. 한 곳이라도 더 보여주려고 형부를 휠체어에 태우고 다니는 조카들의 모습도 가슴에 남고, 시부모를 위해 열과 성을 다하는 조카며느리들도 매우 예쁘다.

형부가 건강이 많이 약해졌는데도 가족여행을 소원한 것은 코끝을 간질이는 봄 내음을 맞고 싶어서도 아니고, 봄바람에 휘날리는 여인들의 치맛자락이 그리워서도 아닐 게다.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는 가족들의 다정한 모습을 눈에 담아두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에 부응하듯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며 가족애를 다졌다

대형관광버스이지만, 장시간 차를 타는 데다 거동도 불편하고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는 형부는 정말 힘들었을 텐데도, 보고 싶은 가족들 얼굴 실컷 보아 기쁘다고 해 눈물샘을 자극했다.

미풍에 매화 꽃망울이 나날이 부풀어 오르더니 머지않아 꽃봉오리가 터질 것 같다. 겨우내 침묵하고 준비했던 튤립, 크로커스, 수선화 등 봄꽃들이 따사로운 햇살과 포근한 바람에 꼼지락 꼼지락 앙증맞게 꿈틀대더니, 살며시 고개를 내밀어 기쁨을 준다.

은은한 꽃내음과 상큼한 바닷냄새, 신비로운 동굴 여행에 마음마저 초록색으로 변하는 것 같다. 사랑과 설렘으로 시작해 가족들의 축복 속에 금강혼식까지 한 언니 부부의 행복한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가족의 의미와 사랑, 소중함을 깊이 깨닫게 해준 사랑으로 하나 된 가족여행, 행복에 행복을 더했다.

# 이난영 수필가 약력
▶2000년 공우문학, 한맥문학으로 등단
▶청풍문학회, 청주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 수필문학회, 한맥문학회 회원
▶충북수필문학회 부회장 역임
▶충청북도교육청 재무과장 역임
▶수필집 '난을 기르며'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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