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선 수필가

광혜원고 전경

생거진천! 많이 들어본 말이다. 살기 좋은 곳, 진천이란 뜻이다. 아침 고요한 공기를 가르며 내달리는 진천 평야는 탁 트여 있다. 겨우내 추위에 웅크리고 있던 산과 들은 빛나는 햇살에 속살을 씻고 있다.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다. 앞날을 그려볼 수는 있지만 예단할 수는 없다. 하여, 인연이란 말이 있는가 보다. 인연이란 어느 한 쪽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 인연이 있어야 무엇이든 나고 일어나는 법이다. 이른바, 불가의 인연생기론이다.

예를 들어, 한 개의 씨앗이 있다고 치자. 씨앗은 홀로 싹 트지 않는다. 흙이나 물, 햇빛 등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씨앗은 '인'이요, 이를 도와주는 조건인 흙이나 물, 햇빛 등은 '연'이다. 세상만사 모든 것이 그렇다. 인과 연이 만나야 이루어진다. 인만 있어도 안 되고, 연만 있어도 안 된다. 남녀 관계가 그렇고 마음의 작용도 그렇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 내가 생겨났다. 내가 꽃을 보니 예쁘다는 생각이 든다.

17번국도, 생거진천 길을 따라 광혜원으로 가는 것도 다 인연의 소치다. 내 어찌 교직 인생 3막 1장을 광혜원에서 시작할 줄 알았겠는가. 교사 생활이 인생 1막이라면, 전문직 생활은 2막이다. 이제 학교의 책임자가 되었으니 인생 3막이 시작된 것이다. 3막 중에 제1장을 생거진천 광혜원에서 열게 된 것이다.

'생거진천' 이야기가 광혜원면 금곡리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알고 흠칫 놀랐다. 경기도 안성과 맞닿아 있는 광혜원! 이곳에 살기 좋은 진천 이야기가 서려 있을 줄이야. 1994년 진천군지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한 『진천군지』에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진천에 '허주부'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 딸이 용인으로 시집을 갔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곳간 열쇠를 주지 않고 어디를 갈 때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곤 했다. 알고 보니, 곳간에 아무 것도 없어서 열쇠를 주지 않은 것이었다. 이를 깨닫고는 남편과 함께 열심히 일했다. 몇 년 지나니 집안 살림살이가 어느 정도 넉넉해졌다.

그런데 이 어찌된 운명인가.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바로 이어 남편마저 세상을 떠났다. 홀로된 허주부의 딸은 살 길이 막막하여 친정인 진천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고갯길에서 한 유생을 만났다. 이 유생은 진천 사람으로 서울로 과거를 보러가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눈이 맞아 혼인을 하고 말았다. 결국 재가를 한 것이다.

세월이 흘러, 웃기는 상황이 벌어졌다. 용인에서 전 남편과 낳은 자식들이 성장하여 진천으로 엄마를 찾아온 것이다. 오자마자 용인으로 가자고 애원했다. 허나, 그럴 수가 없었다. 진천에서 재가하여 낳은 자식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서로 엄마를 모시겠다고 떼를 썼다. 참으로 용인 자식이나 진천 자식이나 효성이 지극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고을 사또에게 판결을 부탁했다.

판결은 명쾌했다. 엄마가 살아 있을 때는 진천 자식이 모시고, 죽어서는 용인 자식이 모셔라! 정말 명 판결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살아서는 진천에서 거하고, 죽어서는 용인에서 거하라'란 뜻이다. 한편, 진천은 예로부터 평야가 넓고 비옥하여 살기에 좋고, 용인은 명당 터가 많아 죽어서 묻히기에 좋다는 풍수적인 뜻에서 나온 말이라는 설도 있다.

생거진천 이야기가 내가 가는 광혜원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니 괜히 우쭐한 마음이 든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어머니를 서로 모시겠다고 자식들이 다투기까지 했다니……. 요즘 서로 부모를 모시지 않으려는 세태에 울림이 크다.

광혜원! 광혜원(廣惠院)은 말 그대로 '넓은 혜택이 있는 곳'이란 뜻이다. 근대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하고는 이름이 같지만 엄연히 다르다. 뒤에 '원'자가 붙으면 고려나 조선시대에 공공 여관이 있었던 곳이다. 광혜원은 옛날에 공무를 보는 벼슬아치가 묵던 숙소가 있었다. 관찰사가 새로 부임하거나 퇴임할 때 여기서 서로 관인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아마도 조선시대에는 충주에 도 관찰사가 있었으니, 여기 광혜원을 거쳐 가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로 보면, 광혜원은 매우 의미 있는 곳이다. 역사적으로 교통이 발달한 곳이고, 생거진천의 원조요, 효자 동네다.

덕성산 기슭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오랜 숙원사업이던 광혜원 중·고를 분리하여 고등학교를 신축 이전했다. 한 눈에 보아도 좌청룡우백호다. 덕성산을 중심으로 양 날개가 동서로 뻗어 있다.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아오를 기세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내 여기에 한 줌의 씨앗을 뿌리리라.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모든 이와 함께 싹을 틔우리라. 그리하여 '생거진천'의 기운과 '광혜'의 넓은 혜택이 한 아름 꽃으로 피어나도록 하리라.

프로필
▶월간 문예사조 수필 등단

▶CJB 청주방송 제5회 TV백일장 수필 장원

▶한국문인협회, 청주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저서 '청소년을 위한 명상 이야기', '학교로 간 붓다', '소똥 줍는 아이들'

▶진천 광혜원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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