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전섭 수필가

언 땅과 잔설을 녹이며 새 생명이 꿈틀댄다. 울타리 밑 까만 호수석 언저리가 수상하다. 삼삼오오 머리를 맞대고 수런거린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호기심과 두려움이 어우러진 떨림의 소리인가. 지난 계절의 잔영이 뒤엉킨 낙엽더미가 조금씩 들썩이더니 머리를 빼꼼 내민 녀석들이다. 동토를 헤집고 나오느라 얼마나 용틀임을 하였던지 온통 흙투성이다. 암팡지게 꽃대궁을 올리며 서있는 모습이 제법 의연하다. 봄의 전령사 복수초다.

복수초의 고향은 시베리아 아무르 강변이다. 삶의 생태가 남다른 들꽃이다. 모든 식물이 겨울잠을 잘 때 먼저 피어나 오목반사경처럼 생긴 겹꽃으로 곤충을 유혹한다. 암수 한 그루 식물로 자체 수정은 물론 에너지 축적으로 열을 내서 눈을 녹인다. 2~3월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6월경에 긴 휴면기에 들어간다. 일 년 중 절반을 휴식하며 뿌리는 잠들지 않고 발열을 위한 에너지를 비축한다. 틈새시장 공략으로 극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은 가히 일품이다. 열꽃은 나의 아내와 많이 닮은 꽃인 듯하다.

아내의 몸이 불덩이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후끈거린다. 장작불 같은 열기가 온몸을 뒤덮는다. 상처 입은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신음 섞인 호흡소리가 안쓰럽다. 얼굴에도 한여름의 더위를 품은 듯이 땀범벅이다. 흠씬 배인 땀방울 사이로 붉은 반점의 열꽃이 피어난다. 열꽃이 흘린 눈물로 베갯모와 이부자리가 흥건하다. 중년의 여인에게만 피는 갱년기 증상이란다.

아내의 열꽃은 단순한 열꽃이 아니다. 높은 퇴적층처럼 쟁인 고단한 삶 속에 심지를 박고 회한의 세월을 사르는 불꽃이다. 열꽃이 타오르며 고통이 심해질수록 아내의 투정도 늘어난다. 펄펄 끓는 도가니처럼 감정의 기복이 격해지면 잔잔한 호수에 파문이 일 듯 그간의 부부사이에서 서운했던 일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놓는다.

아내는 맞벌이 부부의 애환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이겨내며 교직 생활을 이어왔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 연년생의 두 아이를 낳았다.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를 남의 손에 키우며 숱한 오열을 토해냈다. 큰 아이를 가졌을 때는 만삭의 몸으로 버스를 네 번씩이나 갈아타고 먼 길을 오갔으니 그 고충이 얼마나 심했으랴. 지금처럼 학교급식이 없던 시절이라 아침도 거르고 새벽에 출근하느라 점심은 늘 라면으로 때우다보니 영양실조로 인해 미숙아로 태어났다. 거의 한달 여 동안 병원의 인큐베이터에서 지냈지 싶다. 그때의 충격과 상실감으로 몸을 추스르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이를 낳을 때 곁을 지키지 못한 나를 붙들고 넋 나간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몸부림치다 실신하던 아내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새봄을 밝히는 노란 복수초 무리는 참 산뜻하다. 봄을 마중하고 겨울을 배웅하는 빛이다. 탐스러운 빛이 그대로 담겨져 복스럽게 느껴지는 꽃이다. 평소 아내를 향한 여러 개의 별칭만큼이나 만인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꽃이기에 이름도 다양하다. 복을 많이 받고 오래 살라는 뜻이 담긴 복수초(福壽草)이다. 눈과 얼음 사이를 뚫고 꽃이 핀다고 얼음새꽃, 눈 속에 핀 연꽃 같다하여 설연화(雪蓮花), 새해 들어 가장 먼저 꽃이 핀다고 하여 원일초(元日草), 꽃이 황금색 잔처럼 생겼다고 측금잔화(側金盞花)라고도 불리운다.

복수초는 접시안테나 같은 꽃잎사귀를 활짝 펴서 열을 모으고 꿀벌을 불러들여 종자를 번식시킨다. 열꽃은 자연생태계에서 살아남고자 애쓰는 진화의 산물이다. 무쇠가 냉온탕을 오가는 담금질을 통해 강철로 거듭나듯이, 아내의 열꽃도 숱한 시간 피고 지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방황을 통해 또 다른 생을 열고 있으리라. 복수초의 발열이 생존을 향한 치열한 삶의 발버둥이듯, 아내의 열꽃도 갱년기를 넘어서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인간이나 식물이나 극한 환경을 극복해야 거듭나지 싶다.

해토머리에 산하가 꿈틀거리며 겨울잠을 털어내고 있다. 가풀막진 언덕배기에서 봄이 휘적이며 내려온다. 봄날인 듯싶은데 여전히 시린 바람이다. 꽃은 시퍼런 계절을 참아내야 피어난다. 희망의 계절을 여는 복수초의 노란 열기가 느껴진다. 복수초는 아침 햇살에 피어나 해질녘에 꽃잎을 접는다. 어둠이 깔리면 안과 밖에서 피어나던 열꽃도 수그러든다. 온 누리를 밝히던 설연화도 꽃잎을 접고 무량한 별빛을 안는다.

새벽이 다가올수록 아내의 거친 숨소리도 편안하다. 포근히 잠든 모습이 곱다. 훈장처럼 새겨진 이마의 주름살 속에 지난 세월 신산(辛酸)함이 묻어난다. 식은 땀방울에 뒤엉킨 아내의 희끗한 머릿결을 보니 가슴이 아리다. 여태껏 나 때문에 고생한 아내를 위해 헌신하리라 마음을 다잡는다. 아내는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어쩜 노란 꽃망울을 열며 세상을 밝히는 복수초처럼 고단한 삶을 잊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내의 숨소리조차 아름답게 들리는 이 밤. '영원한 행복'이란 꽃말처럼 내일은 얼음새꽃이 행복의 꽃바구니를 이고 새봄의 전설로 다가오리라.

약력

▶ 2015년 수필과 비평 신인상
▶ 사단법인 딩아돌하문예원 이사 겸 운영위원장
▶ 청주문화원 이사
▶ 충북국제협력단 친선위원회 위원장
▶ 우암수필문학회 회원
▶ 충북수필과비평작가회의 회원
▶ 청주문인협회 회원
▶ 충북수필문학회 사무국장
▶ 청주대성여자상업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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