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칼럼]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자료사진 / 뉴시스

'비극의 주인공'이 된 박근혜 전대통령(이하 박근혜)의 처지는 구속직전 찍힌 사진 한 장에 오롯이 담겨있었다. 법원에서 영장심사를 마치고 서울중앙지검에 가기위해 검찰차량인 K7 뒷좌석 가운데 자리에 탑승한 박근혜는 특유의 단정한 올림머리는 흐트러졌고 초췌한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는 차를 타기 전에 검찰직원에게 "내가 가운데?"라고 물었다고 한다. 자리에 앉는 순간 새삼스럽게 급전직하(急轉直下)한 자신의 처지를 뼈저리게 실감 했을 것이다.

박근혜의 최후진술은 '선의(善意) 국정수행'이었다. 최순실 게이트가 시작된 이후 한결 같이 주장한 논리다. 하지만 좋은 의도가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이미 이 말을 인용한 더불어민주당의 유력한 대권주자는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갔다가 한 방에 무너졌다. 충청권대망론의 주인공이었던 안희정 충남지사다. 그는 지난 3월19일 부산대에서 열린 '안희정의 즉문즉답' 행사에서 "박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해 "선한 의지로 '없는' 사람과 국민을 위해 좋은 정치를 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한다"며 "저는 그 누구라도 그 사람의 마음은 그 액면가대로 선의로 받아 들인다"고 말했다. 지지율 상승에 고무돼 보수층으로 여론의 스펙트럼을 넒이기 위해 호기(豪氣) 있게 한 말이었지만 여론은 차갑게 등을 돌렸다. 경쟁자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안지사의 말에는 분노가 빠져있다. 불의에 대한 뜨거운 분노가 있어야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일침(一針)을 놓았다.

안희정의 패착(敗着)은 박근혜의 '선의'를 의심하는 국민들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 '선의'로 경제살리기의 주역이 돼야할 대기업 총수들은 검찰앞에서 몸을 사리고 최순실과 그 일당은 기업출연금을 쌈짓돈으로 쓰기위해 모의(謀議)했다. 어느 누가 '선의'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서양속담에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있다'는 말이 있다. 현실은 좋은 뜻만으로는 좋은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 그저 명분만 내세우면서 베푸는 선의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개인과 국가에 치명적인 해악(害惡)을 끼칠 수 있다. 선의가 고의나 악의로 변질되는 사례는 흔하다.

안희정은 '선의'라는 말 한마디로 대권 본선행이 좌절될만큼 추락했으나 박근혜는 영어(囹圄)의 몸이 됐다. 누군가는 "(검찰이)궁궐에서 쫓겨나는 여인에게 사약을 내렸다"며 봉건시대적인 표현으로 분노를 표시했지만 박근혜에게 실망한 사람들도 그의 구속을 바라보며 마음이 편치는 않을 것이다. 박근혜가 이 지경까지 온 것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다. 그는 왜 진즉에 하야(下野)하지 않았을까. 왜 명분과 실리도 없이 국론을 분열시키고 자신을 최악의 상황까지 몰고 갔을까. 측근들이 오판(誤判)을 주입시킨 잘못도 있지만 믿고 싶은것만 믿고 믿고 싶지 않은 정보는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 확증 편향'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라는 탄식을 자아내는 대형 사고의 이면엔 리더의 확증 편향이 작용한 경우가 많다. 아무리 위험하다는 경고가 있어도 독선과 불통이 체질화된 리더는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와 자료를 취한채 경고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탄핵은 세월호 참사, 정윤회 문건파동, 문고리3인방 전횡, 새누리당 총선 참패등 숫한 경고음을 고의로 외면한 귀결이다.

박근혜의 구속으로 우리 헌정사는 다시 한번 상처를 입었지만 불행한 역사는 국가발전을 위한 디딤돌이 돼야 한다. 겨울 한파에도 광화문을 뒤덮은 촛불시위는 '국민의 힘'을 소름끼치도록 보여주었다. 이승만 정권을 무너트린 1960년 4.19혁명으로 내각책임제가 도입됐고 1987년 6월 국민항쟁에 굴복해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이며 여당의 대선후보 노태우가 6.29선언을 하면서 대통령직선제가 받아들여졌다. 역시 국민이 전면에 나섰다. 이번 광화문 촛불시위와 대통령 구속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정치발전을 위해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한다면 역사는 퇴보할 수밖에 없다.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장미대선'으로 5월이면 새 정부가 출범하지만 기대보다는 우려의 시각이 더 많다. 문재인 후보는 적폐를 청산하고 '뜨거운 분노'로 정의를 세운다고 한다. 미래 보다는 과거 지향적이다. 문재인의 '정의'에는 박근혜의 '선의'처럼 불안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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