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콘텐츠진흥팀장

자료사진 / 뉴시스

해가 뉘엿뉘엿 진다. 사람들의 발길은 부산하고 도시는 각다분하며 바람은 정처 없다. 일상의 고단함이야 말해 무엇하랴만 걸어온 길의 아픔과 가야할 길에 대한 절박함 때문일까. 꽃이 피고 지는 풍경, 해가 뜨고 지는 비경, 숲과 새와 나비들의 정겨운 놀이도 사치스러울 뿐이다. 꽃들이 여기저기서 해산의 비명을 지르는가 싶더니 붉은 꽃술이 바람에 무수히 흩날린다. 석양속에 빛나는 풍경들은 하나같이 환생과 순환의 기나긴 시간이 담겨있다. 낮잠 자는 고양이 돌담 사이에도, 은빛 비늘이 춤추는 호숫가에도, 뱀허리처럼 휘어진 오솔길에도, 소나무 미루나무 잎새에도 살아온 날들의 기억이 있기에 더욱 빛나는 것이다.

견딤이 쓰임을 만든다고 했던가. 대지의 풍경이야말로 어쭙잖은 문명의 건물과 저잣거리의 풍문과는 비교할 수 없다. 자연은 과학으로 풀 수 없는 신비가 있다. 인간이 만든 관념과 상관없이 북풍한설과 거센 폭풍우와 태양과 목마름을 견뎌온 자연은 언제나 위대하다. 인간의 삶이 진정 즐거웠던 시대는 세계를 떠돌며 수렵생활을 했던 유목민시대라고 한다. 문명으로부터 소외당하지 않으니 행복했고, 그들의 가슴은 거칠면서도 대지처럼 드넓고 풍요로웠다.

흩날리는 꽃잎들이 햇살에 빛나고 바람에 반짝이며 하얗게 쏟아지는 달빛에 젖더니만 나그네 발길에 분홍빛 미소로 다가온다. 나는 이미 당신의 것, 당신에 의한 것, 당신과 함께 하기에 더욱 아름다운 것이라며 유혹의 몸짓이다. 마을을 지나 산길을 걸으며 숲이 무성한 곳에서 홀로의 자유를 누리고 싶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우물 하나 파고 싶다. 세월에 지치고 남루해진 모습, 무모하게 젊음만 소진했지만 나 이제 돌아온 탕자처럼 삶의 신산함을 떨쳐버리고 내 안의 깊은 뜨락, 금단의 정원이라도 가꾸고 싶다.

이름하여 피정체험이다. 몇 해 전, 세상일에 번잡하고 방황할 때 지인으로부터 전화 한 통화를 받았다. "변 선생, 신앙생활 하시나? 우리 성당에 나와서 기도하고 성경공부도 하며 새 생명을 꿈꾸면 어떨까? 내가 대부(代父) 역할 잘 할게~." 나는 망설임 없이 그리하겠노라 했고 6개월간의 교리공부 끝에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토마스 아퀴나스. 그날 이후 주일마다 미사 보는 두 시간은 설렘과 긴장과 여백의 미로 가득하다.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어 좋고, 여럿이 함께 해서 좋고, 묵상하며 삶의 군살을 걷어낼 수 있어 좋다. 때로는 마음 부려놓고 무념무상의 호젓함도 내겐 새 살 돋는 시간이다. 대자연을 통해 야위어진 삶을 어루만지는 것도 좋지만 아픈 마음을 도닥거리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천주교에서는 피정체험을 한다. 불가의 템플스테이와 같은데 피정은 피세정념(避世靜念)의 약자로 리트릿(Retreat)이라고 한다. 일상을 벗어나 성당이나 수도원에서 묵상, 성찰, 기도 등의 수련을 통해 마음을 치유하고 신앙 속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행위다.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컨텐츠진흥팀장

2000년 전 이스라엘 북부의 어촌 갈릴리에서 예수는 온종일 쫓아다니는 군중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 기도를 했다. 예수의 제자도, 중세의 성인도 산중기도를 했다. 그 전통이 2000년 세월을 거쳐 여기까지 왔다. 소울스테이라는 이름으로 치유와 힐링과 묵상을 통해 모든 욕망을 부려놓고 새로운 생명이 잉태하는 성스러움을 체험하는 것이다. 성당에서의 묵상도 피정이지만 성지체험은 내 마음에 평온이 깃들게 한다. 진천의 배티성지는 푸른 소나무 숲에 잘 가꾸어진 순례자의 길이 호젓하고 아스라하다. 천주교 신자들의 비밀교우촌이었으며 최양업신부의 땀과 신앙이 어려있는 곳이다. 한국 최초의 신학교와 최양업신부를 기리는 박물관도 잘 꾸며져 있다. 괴산 연풍과 제천의 베론성지도 순교자의 거룩함과 맑고 향기로움이 깃드니 피정체험으로 강추한다.

아름다운 것은 어렵다. 몸과 마음이 기진했을 때 기도하며 쉬고 일하는 단순한 일과만으로도 힐링이고 구원이다. 두 손을 모아보자. 마음의 평화가 오고 아픔이 아물고 있지 않은가.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