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호수, 숲의 비밀, 예술이 깊어지는 곳

대청댐

사랑이란 사물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빛을 향해 마음을 열어두는 것. 북풍한설이 몰아쳐도 돌부리에 넘어져도 그 빛을 어루만지고 포옹하며 함께 손잡고 가던 길 마저 가는 것. 이기심과 결별하고 거짓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고 조금 더 가난하고 조금 더 배고파도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 그리하여 사랑이란 세상의 모든 존재의 빛이 되고 소중한 인연속에 풍경이 깃드는 것. 맑고 향기로운 이 땅에서 희망이라는 씨앗을 뿌려 새 순 돋고 꽃 피며 열매맺는 감동을 만들어 가는 것….

오늘 아침에는 분디나무 새 순 잎에 물고 양성산을 한 바퀴 돌았다. 하얀 찔레꽃이 향기를 흩뿌리며 길동무가 돼 주고, 아카시아 향은 정처 없는 나그네를 시심에 젖게 했다. 하루가 다르게 푸른 빛 가득한 숲길은 만나는 매 순간마다 새로움과 긴장과 순박함의 상징인 처녀성을 품고 있다. 사월은 너무 옅지도 짙지도 않은, 그렇지만 청순한 색채를 지녔다. 어린 아이의 살결같이 보드라운 분디나무 새 순은 산 정상쯤에서 사르르 녹으며 목젖을 타고 가슴 깊이 파고드는데 진한 생명의 내음과 맑은 향기가 끼쳐온다. 번잡한 일상의 상처와 고통을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고 그 자리에 햇빛 번지는 맑은 하늘로 가득 채우는 신비를 맛본다. 자연 앞에 서면 누구나 시인이 되고 사랑을 하게 됨을 실감케 한다.

 

대청댐
이종국작가의 분디나무젓가락

"12월 분디나무로 깎은 젓가락, 내 님 앞에 놓았는데 남이 가져다 뭅니다. 아으 동동다리~." 우리나라 최초의 월령체가 고려가요 '동동'의 한 구절이다. 천 년 전 우리 조상들은 분디나무 젓가락을 사용했는데 분디나무는 초정약수의 초(椒)를 상징하는 산초나무다. 톡 쏘는 맛과 항균성이 높아 잎은 장아찌를 해 먹고 열매는 기름을 짜서 먹었다. 나무는 한 겨울에 껍질을 베껴 젓가락을 만들었다. 누군가의 사랑이 되고 누군가의 일용할 양식이 되며 누군가의 희망이 되었으리라. 이종국 작가는 벌랏마을과 마불갤러리에서 닥나무 한지를 뜨고, 분디나무 젓가락을 만들며 예술과 삶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전통은 잇되 시대에 맞는 새로움을 담는다.

 

문의문화재마을

문의는 역사가 깊고 산이 깊으며 마을도 깊다. 사람들의 이야기는 더욱 길고 질기며 숲길 물길 들길은 깊고도 넓어 생과 사를 가늠할 수 없다. 고은 시인은 이 지역 향토시인 신동문의 장례에 와서 시 한 구절 남겼다.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문의에는 시인도 많고 화가도 많다. 건축가 서예가 도예가 음악가 등 예술인들의 보금자리다. 문의 오일장은 구순한 시골 사람들의 인심으로 가득하고 한정식과 매운탕은 그 옛날 어머니의 정성으로 빚은 맛 그대로다. 문화재단지는 고달픈 삶, 지혜로 빛났던 조상들의 흔적이 가득하다. 때로는 방황과 고뇌가 성찰과 각성이 된다. 하여 문의향교는 자신을 깨닫고 세계를 인식하는 곳이다.

문의는 대청호의 은빛호수가 있기에 더욱 빛난다. 어둠을 뚫고 태양이 솟아오른다. 물안개는 호수 깊은 곳의 무엇인가를 끌어 올리더니 부질없다는 듯 하나 둘 부려놓고 빛나는 햇살 속으로 사그라들지 않던가. 원시적인 풍경을 보며 아~ 외마디 탄성을 지른다. 욕망이 인간의 삶을 얼마다 허망케 하고 영혼마저 혼미케 하는지 자연은 소리 없이 풍경으로 말하고 있다. 최고의 예술은 바로 자연이라는 사실에 묵상한다.

그러니 문의에서 하룻밤의 아름다운 추억을 빚으면 좋겠다. 삿된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고 자연과 예술이 함께하는 영혼의 축제를 통해 존재의 가치를 더욱 강건케 하면 좋겠다. 일도 중요하지만 휴식도 필요하다. 바쁘고 허덕이는 도시의 삶을 잠시 접고 가벼운 마음으로 사랑을 하자. 누군가의 희망이 되고 누군가의 벗이 되고 누군가의 그리움이 되는 소풍길에 나서자. 나의 삶이 자연 속에서 스미고 젖으며 물들면 더욱 좋겠다.

사진 홍대기(사진작가) / 글 변광섭(에세이스트·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콘텐츠진흥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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