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병학의 사진학교]24

August Sander_Soldier. 1940년경 / 1990년 인화

자, 이제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원점? 사진작품의 진품성 말이다. 필자는 사진작품의 진품성을 언급하기 위해 잔더의 다양한 직업군의 인물사진들을 추적하기 위해 그에 앞선 초기 명함판 증명사진과 베르티옹 카드판 증명사진을 거쳐 루프의 '초상사진'을 단편적이나마 읽어보았다. 필자는 지나가면서 다음과 같은 잔더의 진술을 인용했다. "우리는 진실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동료와 후세에 물려주어야 한다. 이 진실이 우리에게 유리하건 그렇지 않건 관계없이 말이다."

잔더의 '시대의 얼굴'은 마치 사라질 파리의 도심을 기록한 아제의 사진처럼 사라질 독일사회의 초상을 담은 것이다. 잔더가 촬영한 20세기 60명의 독일인은 독일사회에서 저마다 역할을 맡고 있는 사회구성원이다. 그는 그들의 진실된 모습을 담아 "그 진실이 우리에게 유리하건 그렇지 않건 관계없이" 동료와 후세에 물려주어야 한다고 진술한다. 하지만 나치의 생각은 달랐다. 이를테면 잔더가 실증적 독일인의 유형학을 모색하려고 했던 반면, 나치는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위한 독일인의 유형학을 구축하려 했다고 말이다. 따라서 나치는 잔더의 '시대의 얼굴'을 독일의 민족사회주의의 건설에 '유리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 결국 1936년 나치는 잔더의 '시대의 얼굴' 잔여본과 사진원판을 압수하여 파기한다.

잔더는 '시대의 얼굴'을 몰수당했던 당시 군인을 모델로 삼아 촬영하기 시작한다. 그 사례로 사진계에 잘 알려진 잔더의 '군인'을 보자. 그것은 젊은 군인의 상반신을 찍은 사진이다. 배경은 어느 농가이다. 따라서 그 젊은이가 군인이 되기 전에는 작업복을 입고 그 자리에 서있는 것을 상상케 한다. 잔더의 '군인'은 '젊은 농부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를테면 젊은이가 농부의 작업복을 입으면 농부가 되고, 정장을 입으면 도심 젊은이가 되고, 군복을 입으면 군인이 되듯이 말이다. 잔더는 그 '군인'을 촬영할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 그는 그의 사진작품을 몰수했던 나치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는 1897년부터 1899년까지 2년간 룩셈부르크의 국경과 인접한 트리어(Trier)에서 군복무를 했던 군인시절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는 군 감옥에 수감된 그의 아들 에릭(Erich)을 떠올렸을 것 같다. 에릭은 1931년 나치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사회주의 노동자당 SAP당원이었다. 1934년 그는 나치에 체포되어 10년 구형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구형이 거의 끝나갈 무렵 사망한다.

잔더는 군인을 전신상이 아닌 (허리 위의) 상반신만 찍었다. 왜일까? 잔더의 '군인'은 건강한 젊은 군인의 모습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왠지 부자연스럽게 보이는데, 그래서 긴장감마저 느끼게 한다. 특히 젊은 군인의 눈을 보면 순박함과 함께 두려움이 느껴진다. 그것은 일반 군인의 사진과 장교의 사진을 옆으로 나란히 놓았을 때 더 잘 드러난다. 두말할 것도 없이 잔더의 '군인' 사진들도 '시대의 얼굴'에 담겨진 20세기 60명의 독일인과 마찬가지로 당시 독일사회에서 저마다 역할을 맡고 있는 사회구성원들 중의 일원이다. 따라서 그 군인들의 모습은 다른 사회구성원들과 함께 그들에게 유리하건 그렇지 않건 후세로 물려주어 역사적인 증언가치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잔더의 사진작품의 진품성은 그 사진의 물질적 지속성과 함께 그 사진의 역사적인 증언가치까지 포함하여 그 사진에서 원천으로부터 전승될 수 있는 모든 것의 총괄 개념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사진의 역사적인 증언가치는 사진의 물질적 지속성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복제의 경우에도 물질적 지속성이 사람의 손을 떠나게 되더라도 사진의 역사적 증언가치는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사진의 권위, 사진의 전통적 무게(의미) 역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 / 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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