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조형숙 서원대 영어교육과 교수

이 사진은 해당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자료사진 (클립아트코리아)

나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다. 출산 후 증세가 심해져 손발이 얼음장처럼 차갑다. 예전엔 보통 내복을 입었는데 요즘에는 기모가 들어간 레깅스를 입곤 한다. 무심천에 벚꽃이 피고 느닷없이 찾아온 봄기운에 레깅스를 벗고 스타킹을 신으려고 찾아보니 아뿔싸 한 켤레도 없다. 곧장 근처 가게에 들렀더니 중년의 아주머니 한 분이 스타킹을 만지작거리며 고르지를 못하고 있다. 내 것만 두 개를 골라 계산대로 가려는데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크게 하신다. "없어! 아니, 우리 딸아이가 필요하다는데. 하나도 없어!"

못 들은 척하고 가려는데 또 들린다.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한 켤레도 없지. 빨리 사다줘야 하는데…." "어떤 색깔 찾으세요?" 오지랖도 넓게 마트 직원으로 빙의되어 물어봤다. 살색 스타킹을 사려는데 하나도 없어 난감하단다. "제가 골라드릴까요?"

혹여 노안이 와서 작은 글씨가 잘 안 보이나 싶어 두어 개 골라 드리니 그게 아니란다. "그건 살구색이고 우리 아이는 살색 스타킹을 원해요."

그제야 상황이 이해됐다. 살색이란 '살갗의 색깔'이란 의미다.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여러 인종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살색'으로 통칭하여 피부색을 한 가지로 지정하는 것은 인종차별적 요소가 짙다. 그래서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는 '살색' 대신 '살구색'으로 표현하도록 권고한 바 있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생활 속에서 조금씩 실천한 셈이다.

사람의 살색은 가지각색이다. 피부색이 희고 밝은 백인종부터 황인종과 흑인종까지 다양하다. 같은 아시아인의 피부색도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한국인 중에도 피부색이 밝은 사람도 있고 검은 사람도 있으니 살색을 특정하기 어렵다. 흔히 살색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되는 한국의 크레파스 색깔은 피부색으로 보기에는 매우 밝은 편이다. 앵글로색슨 혈통의 백인들에게나 알맞을 정도다. 백인 위주의 글로벌 사회경제구조 속에서 옅은 살구색을 피부색의 디폴트값으로 지정하는 것은 백인 위주의 가치를 당연시하는 셈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다문화사회는 문화 경제적 편익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만, 인종적 특성과 문화다양성을 세심하게 존중해 주지 않으면 화약고처럼 터져버릴 수도 있다. 세심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뜻이다. 의료용 밴드를 통해서도 다문화 지표를 가늠할 수 있다. 면도를 하다가 베인 상처에 붙일 밴드를 사기 위해 의료용 밴드를 샀다고 치자. 밝은 살구색 밴드일 경우, 피부색이 어두운 사람이 사용하면 그 상처 위치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반면 밝은 피부톤 위에 짙은 갈색 밴드를 붙이면 보기가 싫을 것이다. 자신의 피부톤에 어울리는 의료용 밴드를 '손쉽게' 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미국 사회의 다문화 지표 중의 한 항목이다. 실생활에서 세심하게 존중해 주지 않으면 화약고처럼 터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색깔의 밴드만 살 수 있다는 것은 일상화된 문화폭력이다. 유럽계 미국인은 화이트(White),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블랙(Black)으로 불린다. 한국인은 스스로를 황인종이라고 말하지만, 옐로우(Yellow)는 아시아인을 지칭하는 모욕적인 말이다. 미국 인디언을 홍인(紅人, Red)이라고 부르고 브라운(Brown)은 피부색이 짙은 남미계 이민자를 의미한다. 특정 색깔이 '살색'으로 규정될 때, 그 색을 갖지 못한 이들은 시스템의 아웃사이더가 된다. 이 세상에 살색이란 색은 없다. 어제는 살구색 스타킹을 신고 무심천을 따라 걸어서 출근했다. 벚꽃이 스러져 내린 후 잎사귀들이 연두빛 얼굴을 내민다. 저들도 곧 짙은 초록이 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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