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삶의 파편, 기적소리·흐르는 물살에 띄어 보낸다

충주 삼탄역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이란 생각의 산파라고 했다. 여행이란 떠나는 것, 만나는 것, 돌아오는 것이라고 말한 이도 있다. 낯선 풍경, 낯선 사람을 만나 앙가슴 뛰는 추억을 만들고 새로움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며 세계를 받아들이는 행위다. 흉터가 아물면 더 단단해지는 것처럼 사소한 경험이 때로는 나의 삶을 치유하고 힘을 주며 잔잔한 감동으로 물결치게 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근대 서정문학의 대표작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작 중 가장 아름다운 구절로 알려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첫 문장이다. 긴장과 불안으로 가득찬 시간이 지나고 희망과 만남이라는 여명의 순간을 담은 것이다. 기차여행은 약간의 견딤과 인내가 필요하지만 사색과 성찰과 기다림의 시간을 준다. 스쳐가는 창밖의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다. 덜컹거리는 기차안 사람들의 이야기는 애잔한 소설이고 쓸쓸한 수필이며 감동의 영화가 아니던가.

 

충주 삼탄역

영화 <박하사탕>에서 영호(설경구)는 '가리봉 봉우회' 야유회 장소에 느닷없이 등장한다. 삼탄역 인근의 유원지. 스무 해 전 첫사랑 순임과 소풍왔던 곳이지만 시간은 흘러 모든 것이 달라졌다. 삶의 모든 것이 썩고 망가지고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면서 벼랑 끝에 서 있다. 고가철로 위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라며 절규한다. 영호의 절규는 기적을 뚫고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춤추고 노래하며 삶을 찬미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왜 이토록 서글플까 생각하며 자책한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아닐까.

 

충주 삼탄역

충북선은 대전에서 신탄진, 조치원, 오송, 청주를 거쳐 증평, 음성, 주덕, 충주, 삼탄, 봉양, 제천으로 이어진다. 삼탄역에서 내려 10여분을 가면 삼탄유원지가 나온다. 영화 <박하사탕> 촬영지다.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철로위로 기차가 거친 숨을 몰아쉰다. 산속 깊은 터널을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사라진다. 물은 맑고 물길은 정처 없다. 호수를 비추는 숲은 붉은 꽃과 푸른 잎새와 살랑이는 바람과 눈부신 햇살로 가득하다. 무량하다. 소풍 나온 사람들은 말없이 풍경에 젖는다.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호숫가를 거닐거나 그 움직임 하나 하나에 삶의 쉼표가 느껴진다.

삼탄은 소나무여울, 따개비여울, 광천소여울 등 세 여울(탄·灘)이 어우러진 곳이다.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기암절벽이 아찔하며 흐르는 물살이 맑고 명료하다. 천등산, 지등산, 인등산이라는 천지인이 감싼 모양새가 포근하고 넓어 천주교인들의 야외 미사장소로도 이름 나 있고, 인근 청년들의 천렵장소로 최고 인기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지친 삶의 파편들을 토해낸다. 자연은 아무 말 없이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기적소리에, 말없이 흐르는 물살에 낡은 생각일랑 띄어 보낸다.

충주 삼탄역

기차역은 민초들의 삶의 현장이다. 기적이 울리면 약속이나 한 듯 짐을 들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통학하고 장에가고 기다리며 만나고 헤어지는…. 화려했던 시절에는 대합실이 장날처럼 북적였다. 이 동네 시인 신경림의 '기차'라는 시가 애달프다. "꼴뚜기젓 장수도 타고 땅 장수도 탔다. 곰배팔이도 대머리도 탔다. 작업복도 미니스커트도 청바지도 타고, 운동화도 고무신도 하이힐도 탔다. 서로 먹고 사는 얘기도 하고, 아들 며느리에 딸 자랑 사위 자랑도 한다.… 그냥 그렇게 차에 실려간다. 다들 같은 쪽으로 기차를 타고 간다." 길이 험할수록 함께 걸어갈 길벗을 더욱 그리워한다. 오랫동안 만남을 기다려온 연인처럼 에덴의 동쪽으로 발길을 향한다.

사진 홍대기(사진작가) / 글 변광섭(에세이스트·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콘텐츠진흥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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