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희 수필가

탱자나무꽃

봄볕이 찬연합니다.

이제 비로소 산직마을, 자그마한 그의 고향집 탱자나무울타리에 탱자꽃이 하얗게 웃습니다. 실로 100년 만입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의식세계에서 멀어져간 주인을 외롭게 지켜온 꽃, 올해만 핀 건 아니겠지만 이리 밝게 웃는 모습이 있었을까요.

보재 선생의 삶을 가슴에 묻은 채 고향마을에서 초가를 지키고 있던 탱자나무꽃은 하얗게 밤을 지새우며 수십 년간 제 혼자 피고지기를 반복해 왔을 테지요, 얼마나 눈물겨운 세월이었을지 마음이 싸해옵니다.

벌들만이 유일한 친구였던 듯 탱자꽃 사이를 넘나드는 모습이 친근하면서도 정겨워 보입니다. 사람을 대신하여 탱자울과 함께 해온 벌들이 모처럼 손님맞이에 신바람을 냅니다. 콧노래를 앵앵거리며 분주히 움직일 때마다 눈곱만한 엉덩이가 꽃잎위에서 살랑거립니다. 좀 늦은 감이 있으나 순국 100주년을 맞으며, 몇 년 전부터 본격적인 숭모사업이 시작된 것이 퍽이나 기쁜가 봅니다.

보재 이상설 생가

새롭게 인식하게 된 보재 이상설 선생의 순국 100주년 추모제향 현장은 선생의 업적에 대한 재조명을 환영하는 사람들로 인해 북적댑니다. 이 작은 마을에 수백 명이 모여든 건 아마 처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당 '숭렬사'에서는 지금 엄숙한 제향의식과 더불어 추모제례악이 탱자꽃 향기에 실려 은은히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덤벼드는 일제에 맞서다가 스스로 탱자울이 되어 조국을 지켜 온 것일지도 모를 보재 선생! 그는 지금 어떠한 마음일까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그의 유언입니다.

그래서일까. 선생의 업적에 비해 나타낼만한 자료가 온전히 전해지는 게 없습니다. 심지어 그는 대한민국 국적조차 없었습니다. 일제가 '조선민사령'을 제정하여 새 호적을 만들 당시 일제의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국적자로 타국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 순국하신 보재 선생, 그의 유해는 깡그리 재가 되어 러시아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에 뿌려지고 유허비만 홀로 그를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들에 의해 지난해 겨우 국적이 회복되었습니다.

숭렬사를 끼고 돌아 나지막한 언덕배기에 선생의 초혼묘가 있습니다. 한 줌 재조차 남기지 않은 선생의 묘는 1996년 수이푼 강변에서 초혼식을 마치고 떠돌던 혼과 강가의 흙 한줌을 가져와 부인 묘에 합장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묘소에는 그 흔한 둘레석 조차 없습니다.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묘 앞에 서니 외롭게 투쟁해 삶에 마음이 시립니다.

보재, 그가 어떤 사람입니까.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농촌마을에서 태어나 1894년 조선조 마지막 과거에 급제하고 성균관장을 역임한 신·구 학문에 모두 능통한 학자요. 항일 독립운동의 선구자가 아닙니까.

굵직한 업적 중 일부를 꼽아봅니다. 북간도 용정에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의 건립은 민족 교육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또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밀사로 파견됨을 계기로 구미 각국을 돌며 일제침략의 부당성과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렸습니다.

이후 연해주 한흥동에 한인마을을 건설,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고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여 정통령으로, 항일투쟁을 계속하다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17년 순국 하였습니다.

마흔일곱 해, 오직 나라를 위해 불꽃처럼 살다 간 그의 일생을 더듬어 보면 탱자나무 가시밭길보다 더 험한 삶이 고스란히 읽힙니다.

김윤희 수필가

그의 생가에 이르러 처음 마주한 하얀 탱자꽃을 보니 가슴이 뜁니다. 왠지 예사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의 눈물겨운 조국애가 몽글몽글 하얀꽃으로 피어나지 않았나 싶어 처연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보재 이상설 선생! 탱자가시울 같은 생에서 조국 독립이란 꽃을 피우기 위해 흘린 눈물이 얼마면 이리 새하얀 꽃으로 향기를 피워 올릴 수 있을까요?

선생의 순수한 민족혼이 탱자울에 앉아 하얗게 웃고 있습니다. 옆에서 나도 살짝 얼굴을 디밀고 그의 정신이 담아 봅니다. 은은한 향기가 마음에 촉촉이 젖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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