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 조형숙 서원대학교 영어교육과 교수

위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으로 해당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자료사진 (클립아트코리아)

3-4교시는 미술시간이다. 민기가 쉬는 시간에도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고 자동차 그림을 그린다. "우와! 민기가 자동차를 잘 그리네." "난 자동차 좋아요." 러시아에서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말수가 적었던 아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한다. "자 그럼 이번 시간에는 우리 민기가 친구랑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노는 모습을 그려볼까?" 선생님 말에 아이가 그림 그리기를 멈추고 빤히 쳐다본다. "전 친구가 없어요. 한국에서는 친구랑 놀아 본 적 없어요."

다문화 언어교육 연구를 위해 나는 다문화 학교라고 불리는 위탁교육기관에서 2년간 수업을 참관했다. 민기도 그때 만난 아이다. 민기는 한국 아빠와 러시아 엄마 사이에서 한국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맞벌이를 하기위해 아이는 4살이 되면서 러시아의 할머니 댁에서 자랐다. 3년 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또래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다니지만 민기는 한국말을 잊어버려서 일반학교에 다니는 대신 다문화 학교에서 공부했다. 위탁기관에 초등학생은 단 세 명. 3학년 누나와 5학년 형이 전부다. 민기는 다문화 학교를 다니는 동안 한 번도 또래 친구가 없었다.

"외로워." 7살짜리 아이의 혼잣말이다. "심심해"가 아니라 "외로워"여서 믿기지 않았다. 자신의 결정과는 상관없이 부모의 결혼과 직업 때문에 국경을 넘어 이주하는 아이들이 있다. 대개 중도입국 청소년들은 한국어를 익히기 전까지는 다문화 예비학교 혹은 위탁 교육기관 등에 다닌다. 한국어가 서툴기 때문에 다문화 학교에 다니는데, 다문화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한국어가 빨리 늘지 않는다. 다문화 학교에 다니다 보니 또래 한국아이들과 격리되고 교감을 나누기 어려운 악순환이 계속된다.

중학교 과정에 등록한 학생들도 있다. 14-15살짜리 아이도 있고 20살 가까운 청년들도 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자홍기르는 꼬박꼬박 숙제도 잘해오고 쉬는 시간에도 단어를 혼자 복습한다. 기타는 수준급으로 친다. 중학교 과정까지 개설되어 있는 그 다문화 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에 가야한다. 곧 스물이 넘는다. 7살 아이도 외롭고 스무 살 청년도 외롭다. 그들이 외로운 이유는 격리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이 주류집단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열심히 한국어를 배우고 있지만, 한국어를 익힌 뒤에도 한국 아이들의 또래집단에 융화될 수 없다는 불길함을 떨칠 수 없다.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고 해도 문화와 감성을 소통할 수 없다면 외톨이 아웃사이더로 남게 된다.

민기는 1층 마당에서 배드민턴 채로 혼자 공을 튕기면서 놀기 일쑤다. 자홍기르는 한국어 능력 검정시험을 준비하느라 단어를 외우고 있었다. 도시의 한복판에서 모두들 외로워서 힘들어 한다. 외로움의 신호등이 깜박깜박 점멸한다. 신호등이 깜박이며 녹색 점선이 한 칸씩 줄어들고 있는 횡단보도에 서있는 느낌이다. 물끄러미 창밖을 보던 샤오야가 묻는다. 한 할머니가 유모차에 의지해서 천천히 걷고 있다. 도심에서 살짝 비켜선 슬럼가의 흔한 풍경이다. "노인 공격해야 합니다. 맞아요?" "아니오. 노인을 공격하면 안 됩니다. 공격이 아니라 공경해야 합니다."

샤오야는 본국에서 부모의 이혼을 경험했고 엄마가 한국인과 재혼하면서 엄마를 따라 중국에서 왔다. 최근 한국 아빠가 딸로 입양을 해주었다. 특별귀화 조건에 해당되어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고 연신 기뻐했다. 민기는 얼른 한국어를 배워 일반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놀이를 하고 싶어 한다. 자홍기르와 샤오야는 각각 요리학교와 간호보건학교에서 공부할 계획이다. 녹색신호가 끝나도 그 아이들이 마저 건너갈 수 있도록 조금만 더 기다려 줄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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