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의 낡고 애달픈 풍경… 청주정신 켜켜이 쌓여있는 곳

골목길은 오래된 마을의 실핏줄이자 서민들의 진한 땀방울이 깃든 곳이다. 큰 길은 넓고 빠르지만 골목길은 좁고 느리며 깊다. 신작로는 근대의 상징이지만 골목길은 아련한 추억과 사랑을 품고 있다. 골목길의 낡고 애달픈 풍경은 시간의 퇴적층이자 우리의 자화상이다.

골목길에 들어서면 낯설지만 가슴 시리게 떠오르는 옛 이야기가 살갑게 맞이한다. 돌담 사이로 빛과 그늘의 숨바꼭질을 즐기며 까치발로 담장 너머의 풍경을 훔친다. 장독대에는 장익는 소리로 그윽하고 봉숭아 채송아도 오종종 예쁘다. 악동들은 줄넘기 소꿉장난에 해 지는 줄 모르고 어른들은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니 한유롭다.

사람들은 아스팔트 도로에 서면 달리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된다. 목적지까지 빨리 도착하고 싶은 조급증이 발동한다. 그렇지만 골목길에 들어서면 자아의 세계로 돌아온다. 주변 풍경을 두리번거리게 되고, 낯선 사람을 만나면 말동무가 되고 싶고, 돌담 앞에서면 가던 길 멈추고 신화와 전설을 찾는다. 지나온 삶의 궤적을 엿보며 사진으로 담거나 수채화로 붓질을 하거나 한 편의 시로 그 감동을 남기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청주의 골목길을 예찬했다. 전주나 군산처럼, 통영이나 부산처럼, 대구나 서울의 북촌처럼 골목길과 근대문화유산을 상품화 한 곳이 많지만 청주는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기에 더욱 값지고 그리움이 짖다. 천오백년의 역사를 오롯이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낮고 느린, 맑고 향기로운 청주정신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곳이며 기쁨과 영광, 아픔과 상처가 깃든 곳이다. 공간은 역사를 낳고 사랑을 낳는다는 위대한 진리를 깨닫는다.

근대 양관의 모습 / 홍대기(사진작가)

일신여고 안팎으로 6개의 양관 건물이 있다. 일제 강점기 선교사들이 서양식 건축양식과 한옥의 형태를 조화롭게 꾸며 교회당으로, 병원으로, 숙소로, 교실 등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일신여고에서 서운동으로 발길을 옮기면 곳곳에 100년 전후의 한옥이 아담하고 다정스레 반긴다. 주변에 위치한 우리예능원과 동부배수지와 충북도청도 근대문화유산이다. 대성동의 청주향교는 청주가 학문과 예절과 의로움의 고장임을 알 수 있는 곳이다. 세종대왕은 이곳에 책을 9권 하사했으며 세조는 이곳에 들러 친히 제향을 올리기도 했다.

수동 성공회성당 / 홍대기(사진작가)

청주의 풍광은 옛 도지사관사와 수동 성공회성당에서 즐기면 좋다. 동산위에 서서 시내를 굽어보면 일상의 남루함과 사소한 것들의 질감이 마음속에 쟁여진다. 지금은 문화공간이 되었지만 도지사 관사는 일제 강점기에 건립된 이래 도백(道伯)의 숙소였다. 시대의 아픔과 정치인들의 욕망이 시간속에 축적되고 공간속에 확장돼 있을 것이다. 성공회 수동성당은 건축양식이 빼어나다. 낮은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팔작지붕의 목조한옥으로 만들었다. 서양식 건축양식에 기와지붕을 입힌 여느 근대문화재와는 달리 전통 한옥의 기법과 디자인에 서양식 감각이 함께 융합된 것으로 한국의 아름다운 성당 20선에 포함돼 있다.

육거리시장과 제일교회와 성안길과 청주시청을 지나 방아다리로 이어지는 길도 근대문화유산의 숨결로 가득하다.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내 희미한 기억의 문을 두드린다. 어린 시절의 신화가 새순 돋듯이 머릿속에서 꿈들 거린다. 송홧가루가 풍문처럼 떠돈다. 나른하지만 나의 본질을 찾는 사유의 보궁이다. 골목길의 속살을 좀 더 보고 싶지만 갈 길 멀고 할 일 많으니 오늘의 여정은 여기서 끝내야겠다. 들뜬 해후가 무익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담지못한사진들

근대양관 / 홍대기(사진 작가)
근대양관 / 홍대기(사진 작가)
근대우리예능원 / 홍대기(사진 작가)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글 / 변광섭(에세이스트·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콘텐츠진흥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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