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힘들때 아내는 오아시스였다"

천티화(사진 왼쪽)·박준겸 부부 / 이완종

[중부매일 이완종 기자] "저는 11살 박한나입니다. 우리엄마는 베트남에서 왔대요. 엄마는 국적은 다르지만 정말 한국말도 잘하고 한국음식도 잘해요. 또 가끔 배트남의 언어와 문화도 알려주는데 이런 우리엄마가 저는 참 자랑스러워요."

온 국민이 월드컵의 열기로 들끓었던 2002년, 천티화(46·음성군 대소면)씨는 박준겸(55)씨와 결혼해 한국으로 들어왔다. 당시 31살의 나이로 낮선 한국 땅을 밟은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생소하고 서툴렀다.

특히 언어의 장벽이 가장 컸다. 한국어를 전혀 할 수 없었던 천티화씨는 모든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까운 재래시장을 찾아 식료품을 구매하고 한국의 대표메뉴인 '김치찌개'도 끓일 수 있을 정도로 한국생활에 적응했다.

천티화씨는 "처음 남편을 따라 한국으로 들어 왔을 땐 모든 것이 낮설고 어려웠다"며 "인근 슈퍼마켓에 가는 것 조차 어려워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움을 받았었는데 지금은 말만하면 한국음식을 금방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로 한국생활에 적응했다"고 말했다.

그녀의 한국생활은 처음부터 순탄치만은 않았다. 천씨 부부는 노시부모을 모시고 살았는데 청천병력 같은 시아버지의 '암' 판정 소식을 듣게 됐다. 연로하신 시어머님 또한 병상에 눕게 되며 모든 병간호는 천씨의 몫이 됐다.

더욱이 남편의 외벌이로는 생활비 조차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일과 가사를 병행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그녀는 다른 다문화가정의 아내들처럼 다문화 센터 등의 시설을 이용할 시간이 없어 정식적인 한국문화·한국어 교육 등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때문에 박준겸씨에게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있는 천티화 씨가 항상 고마움의 대상이다.

천티화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자리에서 남편인 박준겸씨는 아내에게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 이완종

박준겸 씨는 "병상에 누워계신 시부모님들을 봉양하며 생활비 마련으로 출근까지 해야 하는 아내에게는 항상 고마울 뿐"이라며 "그녀를 만난 것은 인생의 복이라 생각 한다"고 설명했다.
한때 서울에서 잘나가던 사업이 실패하며 충북지역의 한 자동차 부품 업체에 취직한 박씨는 그곳에서 천씨의 친여동생의 남편을 만난다. 박씨는 우연한 기회로 그로부터 천씨의 사진을 보게 됐고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베트남 행을 택한다.

베트남에서 만난 그녀는 아이들이 잘 따르고 어른들을 공경할 줄 아는 여자였다. 때문에 박준겸씨는 그녀에게 호감을 갔게 됐고 천티화씨 또한 여동생으로 부터 '그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거부감도 없었다. 이처럼 이들은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만나며 결혼에 성공한다.

박 씨는 "사업에 실패하며 어려웠던 시기에 그녀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다"라며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잘 살고 있습니다"고 강조했다.

이런 이들 부부의 꿈은 다문화 가정에 대한 편견이 사라졌으면 하는 것이다. 박준겸·천티화 부부는 "다문화 가정에 대한 시선들이 많이 좋아졌지만 편견은 여전히 존재 한다"며 "그들 또한 지역사회에 함께 사는 이웃이며 가족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는 시간이 된다면 베트남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치고 싶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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